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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는 삶 실천하는 차인표

 

소설을 통해 ‘용서’를 이야기하다

한때 음반을 취입하더니 이번엔 소설을 냈다. 하지만 차인표는 다양한 재주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고 해야 할 일에 자신의 모든 재능을 쏟아 붓는 이다. 그런 그를 만나는 내내 기자는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사랑은 행동입니다. 행동하는 사랑만이 진실된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도 모르면 누구에게도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차인표가 말했다. 그리고 행동으로 보여줬다. 아니 그는 항상 행동을 먼저 하고 그 행동에  대해 말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입을 여는 사람이다. 그는 가난한 나라의 희망 없이 굶어죽는 아이들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그들을 위해 모금했다. 탈북자들의 현실이 가슴 아파 ‘크로싱’이라는 영화를 찍었다. 그리고 얼마 전, 일제강점기에 낯선 땅에 위안부로 끌려간 우리의 할머니들을 소재로 한 소설을 썼다. 제목은 ‘잘가요 언덕’.

1930년대, 백두산 호랑이 마을에 살던 마음씨 착하고 예쁜 소녀 순이와 호랑이 사냥꾼의 아들 용이, 콧물을 훌쩍거려 놀림을 받던 훌쩍이가 일제강점기 위안부 강제징용 중에 겪는 고통에 대한 가슴 아픈 이야기다.

소설은 그가 1997년 김포공항 입국장을 빠져나오는 한 할머니를 바라보면서 느꼈던 감정을 적어놓은 메모로부터 시작되었다. 일제강점기 군위안부로 캄보디아에 끌려가 평생을 그곳에서 살다가 5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훈’이란 이름의 할머니였다. 그는 군을 막 제대하고 신혼 생활 중이었고, TV를 보면서 말할 수 없는 연민과 분노와 서운함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그처럼 작고 예쁜 할머니가 깡패같이 나쁜 놈들에게 끌려가지 않았더라면 이 땅에서 사랑받고 사랑을 베풀며 예쁘게 살아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스토리 형식을 띤 짧은 메모였던 것이 A4 용지로 20매 분량의 짧은 이야기가 되고, 그것이 다시 장편소설이 되어 한 권의 책으로 묶이기까지 10년이나 걸렸다. 쓰다가 다른 일이 생기면 손을 놓았다가 다시 잡는 일이 반복되었다. 집중적으로 집필을 한 것은 3년 전부터. 그때도 펜을 잡았다가 처음 구상했을 때의 마음이 가득 차오르지 않으면 다시 펜을 내려놓았다. 글을 위한 글, 거짓 글을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소설 쓰는 법을 누구에게도 배워본 적이 없기에 지난한 과정이기도 했다. 시나리오를 많이 접해보았기에 기승전결 구조나 대화 만들기는 어느 정도 수월했다. 그러나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낯선 산하를 글로 표현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종이 위에 생각하는 풍경의 지형을 그리고, 그 그림을 보며 글로 묘사를 했다. 노트북이 망가지면서 어렵게 썼던 초고가 모두 날아가기도 했다. 소설이 완성될 동안 노트북이 세 번 바뀌었고, 지금 가지고 있는 초고의 판본만 50~60개나 된다.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긴다(愚公移山)’는 이야기가 떠오르는 순간이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이 순간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과연 값어치 있는 일인가’에 대한 회의와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마다 ‘잘하고 있다’며 칭찬을 해준 아내의 격려가 큰 힘이 되었어요.”


용서와 화해, 그것을 넘어선 생명의 소중함

차인표는 탤런트로서가 아니라 신인 작가로서 예스24, 알라딘 등 인터넷 서점에서 주최하는 ‘독자와의 만남’ 시간을 갖기도 했다. 그는 독자들과 처음 만나는 그 순간이 “43년간 살아온 인생 중 가장 행복하다”며 감격스러워했다. 그는 한 시간 내내 서서 진지한 자세로 독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행사 후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묻고 이야기를 나누며 사인을 해주고 사진을 함께 찍었다. 덕분에 행사는 매번 예정했던 시간을 한 시간 이상 훌쩍 넘기곤 했다.

‘예스24’ 독자들과 만남의 자리에서 한 남성 독자가 질문을 던졌다.

“‘잘가요 언덕’의 주제는 ‘용서’입니다. 위안부 할머니나 연쇄살인 피해자와 같은 문제는 아니지만,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는데, 오랜 기간 용서하지 못해 혼란스러웠습니다. 사실 아직까지 용서할 마음은 들지 않습니다. 저는 시간이 용서가 아니라 망각과 체념만을 허락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용서는 무엇일까요?”

그는 마이크를 들고 곰곰이 생각하더니 다음과 같이 답했다.

“책에 ‘용서’라는 단어가 나오고, 작가의 글에 위안부 할머니들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일본 사람들을 용서해주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썼기 때문에, ‘차인표라는 사람은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을 용서해주라고 말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처음 나눔의 집에 갔을 때 본 전시관에는 할머니들이 위안부 생활을 할 때의 모습을 복원시켜놓았더군요. 병사 30분에 100원, 장교 30분에 200원, 이런 식으로 쓰인 요금판이 붙은 작은 방 안엔 나무로 만든 침상과 군용담요 하나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 곳에서 하루 30명~40명씩, 짐승 같은 남자들을 상대한 분들이에요.

열다섯, 열여섯 소녀들이 말도 안 통하고 음식도 안 맞고 기후도 다른 그런 곳으로 끌려가 유린을 당했어요.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감히 그런 분들에게 이제는 용서하시라고 말하겠어요? 과연 세상에서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겠어요? 볕이 좋아 마당 한쪽에서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차례대로 영정 사진을 찍고 계신 할머니들을 보다가 마치 돌아가실 순서를 기다리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러면서 ‘돌아가시기 전에 할머니들께 진정한 위로와 평화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품었죠.

일본 사람들이 찾아와서 용서를 빌거나, 일본 정부가 잘못했다고 공식 발표를 한다고 해서 이 문제가 끝나는 걸까요? 그럼 할머니들이 행복하게 돌아가실까요? 진정한 위로와 용서가 무얼까, 사람이 사람을 100퍼센트 용서하고 위로할 수 있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장내의 분위기가 잠시 숙연해졌다. 그는 자신이 이 책에서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용서’를 넘어선 ‘생명의 소중함’이었다고 말한다. 추수를 앞둔 벼들이 쓰러졌을 때, 누군가 그 쌀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하나 정성껏 세워 씻어놓으면, 가을 햇살을 받아 언젠가 추수가 되고, 그것으로 배불리 밥을 해먹은 사람은 어딘가에서 따뜻한 사랑을 베푼다. 그처럼 생명이란 살아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일이고, 내가 살아있음이 다른 사람의 살아있음과 연관이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고.

“마침 그 부분을 쓸 때는 연예인 동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안타까운 뉴스들을 연달아 접할 때였어요. 지금도 그런 상황이 계속 벌어지고 있죠. 그들에게 첫째는 많이 미안했고, 두 번째는 할 수만 있으면 한 마디씩 그들을 위로해주고 상처를 보듬어주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더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나눔 유전자’라는 위대한 유산

‘잘가요 언덕’에는 유난히 엄마 없는 아이들이 많이 나온다. 할아버지의 품에서 자라는 순이나, 백호(白虎)에게 어머니를 잃고 복수를 꿈꾸는 용이, 동네 고아 훌쩍이, 순이가 맡아 키우게 된 샘물이는 모두 엄마 없는 아이들이다. ‘예은과 예진’ 두 딸을 입양해 키우고 있는 그의 눈에는 엄마 없는 아이들이 그처럼 안타까운가 보다.  

“저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엄마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힘세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도 엄마를 잃는 그 순간이 가장 슬플 거예요. 엄마는 나에게 생명을 주고 낳아준 것뿐 아니라 내 생명을 품어주는 존재잖아요. 어떤 사람이든 태어나서 엄마 품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는데 그것이 우리가 태어난 이유고, 엄마에게 사랑받듯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요.”

그의 책에 나오는 용서와 화해의 상징, ‘엄마별’은 일차적으로 자신이 믿는 신 하나님을 가리키지만, 두 번째로는 자신의 어머니를 말한다고 했다.

차인표는 자신의 소설을 최초로 읽고 모니터링을 해준 사람도 어머니라고 했다.

“누군가 나랑 비슷한 마음을 가진 사람, 애정이 있는 사람이 읽고 조언해줬으면 했어요. 그래서 어머니와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의견을 들었죠. 어머니는 줄거리에는 관여하지 않고 백두산에 이런 생물이 사니? 어디서 봤니? 자료를 어디서 찾았니? 하며 마치 논문 쓸 때 지도교수가 검증하듯이 물어주셨어요. 지리적, 시대적 사실들을 검증하는 걸 도와주신 거죠.”

그는 어머니의 충고를 따라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고, 그것이 또 맞는지 틀리는지 교차 확인하고, 국회도서관 자료를 검색하고, 때로는 일본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일제시대 군인들의 계급을 확인하기도 하면서 글을 탄탄하게 다듬어갔다.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어떤 분일까.

“서울 근교에서 15년째 농사를 짓고 계세요. 유기농으로 농사를 지어서 우리가 조금 먹고 남는 것은 시설에 가져다주는 ‘헛농사’죠. 어머니는 나의 생명을 낳아주셨을 뿐 아니라 당신이 직접 가꾼, 세상에서 제일 좋고 깨끗한 생명들을 끊임없이 먹여주고 품어주시는 분이죠.”

그에게 어머니는 ‘나눔의 유전자’를 물려주신 분이기도 하다. 그는 2005년 어린이재단(전 한국복지재단)에서 기부금 모금을 위해 만드는 책자 ‘내 마음의 행복창고’에 기고한 글에 어머니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유명인들이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마음의 유산에 대한 글을 담는 ‘위대한 유산’이란 코너였다.


영자가 여섯 살 때 이런 일이 있었단다.

영자의 어머니는 때때로 집 앞을 지나가는 걸인이나 넝마 줍는 아이들, 혹은 고물 파는 아저씨를 집 안으로 청해 가족들과 한 상에 둘러앉아 점심을 먹여 보내곤 했단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 먹을 반찬도 없는데, 더럽고 냄새나는 아저씨들이 가끔씩 한 상에 둘러앉아 이 반찬, 저 국을 퍼먹는 걸 보면서 어린 영자는 나름대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나 보다. … 어느 날 점심시간, 걸인 아저씨랑 영자 그리고 영자의 엄마 이렇게 셋이 둘러앉아 식사를 하게 되었단다. …영자가 걸인 아저씨 냄새를 안 맡으려 최대한 숨을 참으며 된장찌개를 푸려는 순간, 그 걸인 아저씨의 숟가락이 먼저 ‘푹’ 하고 된장찌개 안으로 들어가더란다. 영자는 찌개 먹는 걸 아예 포기했고, 밥 먹는 내내 걸인 아저씨의 수저가 한 번이라도 왔다 간 반찬에는 손을 대지 않았단다. …

이미 모든 상황을 눈치채고 있던 영자의 어머니가 눈으로 조용히 꾸짖고 계셨지만, 영자는 오로지 고추장과 밥만 번갈아 찍어먹으며, 어머니와 기싸움을 했단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영자의 젓가락이 고추장으로 향하는데 걸인 아저씨의 젓가락이 먼저 고추장을 찍었단다. 마지막 보루까지 빼앗긴 영자는 ‘탁’ 하고 큰 소리를 내며 젓가락을 밥상 위에 놓아버렸는데, 그 순간 영자의 두 눈에 불이 번쩍 했단다. 여섯 살 난 어린 영자가 엄마한테 따귀를 맞은 것이란다. 영문 모르는 걸인 아저씨는 어리둥절했단다.

나의 어머니는 서울 근교에서 말도 안 되는 농사를 짓고 계신다. 땅이 오염되면 안 된다고 농약을 전혀 안 쓰고, 일일이 잡초를 뽑으면서 고구마며, 호박이며 재배를 하신다. 땅에 비해 나오는 것도 얼마 안 되지만, 그나마 벌레들이 갉아먹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따가고, 그야말로 지난 십수 년째 헛농사를 짓고 계신다. 그나마 수확물은 우리가 조금 먹고, 나머지는 노숙자들이나 근처 복지원으로 보내진다.

그는 자신의 세 아이, 정민·예진·예원에게도 이런 유전자를 물려주고 싶어한다.

“전 아이들에게 스스로 사는 법을 체득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싶어요.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아요. 아이들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서로 섬기는 심성을 가진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어떤 일이든 1등을 하려고 아등바등하는 아이가 아니라 2등을 하든, 3등을 하든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사는 사람이 된다면, 본인이 행복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요?”

아이들에게 롤 모델이 되어주느냐는 질문에는 쑥스러워하며 뒷머리를 긁는다.

“글쎄요. 그게 쉽지 않네요. 전 아이들에게는 만날 꼬투리만 잡히니까요. 늦게 일어난다고 뭐라 하고….(웃음)” 


“내 직업은 컴패션 자원봉사자, 부업이 배우”

차인표는 이미 널리 알려졌다시피 가난한 나라들의 어린이들을 1대1 결연으로 후원하는 기독교단체 ‘컴패션’ 자원봉사자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얼마 전에도 그는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가서 ‘컴패션 밴드’ 공연을 통해 1천250명의 후원자를 더 모았다고 했다. 여행 중 짬을 내어 아이티라는 중남미 국가에 들러 결연하고 있는 아이를 만나 즐거운 시간을 갖기도 했다. 차인표 부부는 전 세계 32명의 아이들과 컴패션을 통해 결연을 맺고 있다.

인터뷰를 위해 만난 자리에서 그는 기자에게 “내 본업은 컴패션 자원봉사자고, 배우는 부업”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모든 스케줄이 매주 있는 컴패션 선데이나 결연행사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배우 활동을 은퇴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중요하게 여기는 일의 순서가 어느새 바뀌어버렸다.

“저에게도 물론 개인적인 욕심이 있어요. 하지만 언젠가부터 하고자 하는 일의 순위가 바뀌었다고 할까요. 어떤 생각을 많이 하면 다른 생각은 덜 하게 되잖아요. 그런 것처럼 지금은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순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일은 컴패션 봉사도 있고, 책을 써서 독자들과 교감을 하는 것도 있고…. 며칠 있다가 나눔의 집 할머니들을 또 뵈러 갈 건데, 그날 그분들과 소중하게 지내는 것도 중요한 일이죠. 행복한 일을 하면서, 행복한 생각을 하면서 살려고 해요.”

그는 어린아이처럼 매순간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이다. 반대로 말하면 그는 지금 하는 일에서 행복을 느끼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사람들은 ‘바른생활 사나이’라는 꼬리표를 붙여주었다. 또 누구는 ‘미래에 정치를 하려고 그런다’며 의심의 눈길을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정치할 생각은 전혀 없다’며 손사래를 친다.

“사실 예전엔 ‘바른생활 사나이’라는 말이 굉장히 부담스러웠어요. ‘바른생활 사나이’란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잖아요. 저는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지은 죄를 잘 숨기는 사람이에요. 죄를 짓지 않는 사람,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크든 작든 죄를 짓는 것이 인간이죠. 또 어떤 사람이 죄라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죄가 아닐 수도 있는 것이고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바른생활’이라고 부르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어요. 그것이 중요할 때는 어떤 때냐면,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부름으로써 내가 이득을 얻을 때예요. 저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저를 사랑해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더 얻고 싶다는 생각도 없어요. 뭐랄까? 연예인의 특성에 맞지 않게 변한 셈이죠. 나는 이런저런 활동을 하고 책을 쓰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기 때문에 이렇게 사는 거예요. 이 모든 것이 3년 전의 강렬한 경험 때문이죠.”

3년 전 그는, 아내인 신애라를 대신해 갑자기 인도 콜카타에 봉사를 하러 갔다. 갈 때까지만 해도 그는 ‘우리 주변에도 어려운 사람들이 많은데, 이 정도면 기부도 꽤 많이 하고 있고 나름대로 욕먹는 일도 없이 살고 있는데 왜 내가 거기까지 가야 하나’ 하는 불만을 가지고 있었단다.

그런데 그곳에서,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아이들을 만나면서 진정한 행복이 뭔지 단서를 찾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진정한 행복은 많이 가졌을 때가 아니라 서로 나눌 때, 그 사람을 위해 울어줄 수 있는 마음의 창문이 열릴 때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는 현재 자신의 삶이 너무나 행복하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보다 내일이 더 행복할 것이라고 기대한다고 했다. 


죽는 날까지 봉사하는 것이 꿈

이제 갓 데뷔한 ‘신인작가’ 차인표는 이미 또 한 권의 장편 소설 한 권을 탈고해 놓았다고 했다. 쓰고 있는 작품도 여러 편이란다. 하지만 그는 ‘글쓰기는 취미니까 계속하겠지만 출판은 또 다른 문제’라며 명확하게 금을 그었다.

“써놓은 글은 이번처럼 꼭 읽히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책으로 낼 거예요. 하지만 책 한 권 냈다고 다음 책 내는 것은 안 할 겁니다. 독자들이 출간을 요구한다는 행복한 상상을 해도, 제 이야기가 꼭 해야 할 가치가 있다고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다면, 책을 함부로 내지는 않을 거예요. 그런 역량이 안 되는 것 같아요.”

지난 3월초, 책을 내기로 한 출판사에서 그의 책 관련 기사를 발표했을 때 그에게 가장 먼저 연락한 이가 있었다. 2007년 미국 하원에서 위안부 결의안을 통과시킨 마이크 혼다 의원과 다른 의원들이었다. 그들은 축하 동영상과 추천사를 보낼 테니 책 홍보에 사용해도 좋다고 했다고. 그는 일단, 책이 한국어로밖에 출판되지 않은 상황에서 책을 읽어보지도 않은 이들의 추천사가 부담스러워 ‘만약 영문판이 발간되면 그때 해달라’고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예전에 영화 ‘크로싱’ 촬영할 때도 느꼈던 건데, 제가 그런 영화를 찍거나 책을 쓰는 것은 어떻게 보면 깃발을 드는 행위잖아요. 그러면 내가 든 깃발의 색깔에 따라서 사람들이 모이더라고요. ‘크로싱’을 했을 때는 탈북자 단체나 탈북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천주교 사제단이 관심을 보이고, 이런 소설책을 내니까 나눔의 집이나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정말 마음을 쓰는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고 모여들었죠. 지금은 안 하지만 예전에 잠시 주식투자를 한 적이 있는데, 몇 달  후 어느 순간 봤더니 제 주변에는 전부 주식투자를 하는 사람들만 있더라고요.(웃음) 그처럼 내가 어떤 생각을 골똘히 하면 몇 달 후에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내 주위에 모이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매일매일, 순간순간 행복한 것 같습니다.”

차인표는 ‘독자와의 만남’에서 사인을 요청하는 독자 한 사람 한 사람과 긴 대화를 나누었다. 덕분에 행사는 예정시간을 훌쩍 넘겨 끝났다.


그는 언젠가 ‘엄마별’로 떠나기 전까지 꼭 해놓고 싶은 일이 있다고 말했다. 사람의 능력이 얼마나 있는지, 또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이 얼마만큼인지 모르겠지만, 마지막 힘까지 다해 이루고픈 꿈이 있다고 했다.

“지금 전 세계에 굶어죽는 아이들이 6억 명이래요. 비만 인구는 10억 명이고요.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하자는 건 아니지만 비만인구 10억 명 중 99%는 아마 백인일 거예요. 기아 인구의 99%는 아프리카, 동남아, 남미 아이들일 거구요. 저는 단 한 생명이라도 굶는 아이들이 줄어들고, 마음속에 희망을 가지고 사랑을 느끼면서 변화되는 생명이 한 명이라도 늘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어제 두 명이었으면 오늘은 세 명, 내일은 네 명…. 그것을 보면서 인생을 마감하면 최고의 인생을 산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 여성조선
  취재 박혜전 기자 | 사진 이상윤, 신승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