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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영이 쓸 배변 주머니 평생 무료 제공"


 

 

[중앙일보 김진희] '조두순 사건' 희생자인 나영이(가명)에게 현재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심리적 측면에서 보면 쓰라린 상처를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정신과 치료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급한 것은 인공 항문을 달고 사는 나영이가 불편함 없이 일상 생활을 하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나영이가 당장 극복해야 할 현실은 하루 24시간 평생 배변 주머니를 달고 살아야 하는 자신의 모습에 익숙해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배 오른쪽에 인공항문을 달고 있는 나영이는 학교에 갈 때나 잠을 잘 때나 24시간 동안 배변 주머니를 차고 있어야 한다. 배변 주머니는 하루에 한 개 꼴로 필요하다. 불편함도 문제지만 한 개 당 1만원이 넘는 비용은 나영이의 가족에게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이런 어려움 가운데 지난 달 27일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미국 유명 배변주머니 제품을 취급하고 있는 국내 회사가 나영이에게 평생 배변 주머니를 제공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미국 의료전문제품회사 '홀리스터'의 국내취급점 베센메디칼은 2일 "나영이에게 배변주머니를 평생 무료로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나영이는 이 회사로부터 이미 한달 치의 배변주머니와 각종 물품(46만8000원 상당)을 받았다.

◇ "배변 주머니 해결되니 한층 밝아져"= 3일 오전 서울 종로 5가에 있는 베센메디칼을 찾았다. '평생 무료 제공'은 회사 입장에서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들텐데 쉽지 않은 결심을 하게 된 동기가 궁금했다.

"뉴스를 보고 안타까워하던 중 네티즌 모금 운동 모임을 통해 나영이 아버지를 만나게 됐습니다. 아이용 제품은 특별한 장치가 더 많이 필요해서 제가 꼭 도와주고 싶었어요. 아이용 배변주머니를 비롯해 가스 제거제, 대변 응고제 젤리, 피부 보호 연고제 등 필요한 각종 물품까지 평생 지원할 겁니다." 이 회사 사장 서복임(43·사진)씨가 환한 표정으로 말했다.

20여 년 간 의료기기업에 종사해온 서씨는 대장 질환 환자를 위한 장루(인공항문) 주머니(배변 주머니)를 전문적으로 취급해왔다. "회사 적자가 나더라도 내가 살아있는 한 나영이의 배변 주머니는 평생 책임지겠다"는 것이 그의 다짐이다.

배변 주머니를 쓰는 환자들은 방귀 가스를 제거할 수 있는 제거제, 피부의 손상을 막아주는 연고, 설사 형태의 묽은 변을 젤리형태로 응고시키는 응고제, 대변 냄새를 희석시키는 향기팩 등 보조용품이 추가로 필요하다.

그 동안 나영이는 병원으로부터 받은 성인용 배변주머니를 쓰고 있었다. 몸에 비해 크기도 큰 데다 보조 제품이 없어 불편했다. 재질이 뻣뻣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고 주머니 안에는 설사 같은 묽은 변이 가득 찼다. 냄새가 올라와 친구들이 곁에 오려고 하지 않았고 방귀 가스 때문에 배변 주머니가 늘 불룩했다. 나영이 아버지는 "변 냄새가 심해 친구들이 가까이 오려 하지 않아 나영이가 큰 상처를 받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불편함이 해결됐다. "나영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배변 주머니를 일상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에요. '친구들에 비해 나는 조금 불편할 뿐'이라는 점을 인식시켜주고 그것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죠. 그러려면 아이가 혼자서도 사용하기 편한 배변 주머니를 써야 해요. 부드러운 재질의 불투명 작은 주머니에 대변 냄새를 억제해 주는 허브향팩, 가스 제거제, 피부 보호 연고 등 보조 용품 일체를 나영이에게 줬더니 정말 기뻐하더라고요. 이제 배변주머니를 차고 다니는 일상에 조금씩 적응하는 것 같았어요."

서씨는 나영이 외에도 형편이 어려운 노인 20여 명에게 무료로 배변 주머니를 제공하고 있다. 환자들에게 일일이 사용 방법을 가르쳐주고 그 과정에서 흘러내리는 대변을 닦아 주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은 남의 변을 만지는 제 일을 '3D'업종으로 생각할 지 몰라요. 그래서인지 장루 제품을 오래 동안 다루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그런데 저는 이 일을 20여 년 했으니 천직인가 봐요. 더러워진 인공 항문 주변을 전용 비누 제품으로 말끔히 닦아줄 때의 기쁨은 아무도 모를 걸요."

나영이는 서씨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잘 따른다고 한다. "배변 주머니를 처음 쓸 때는 나영이가 좀 우울한 기색이 있었다고 해요. 그런데 이제 익숙해졌는지 요즘은 '파마를 하고 싶다'고도 하고 잘 웃는 등 정말 밝아 보여요. 나영이의 웃음을 돌려주는 데 도움이 됐다면 저는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 "'똥 냄새 난다'며 피하던 친구들에 상처받았던 나영이"= 요즘 나영이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나영이 아버지 송모(55)씨가 지난 2일 나영이의 근황을 들려줬다.

"나영이가 요새 성적이 많이 올랐어요. 얼마 전에는 학교에서 성적 우수상도 받았지요. 원래 똑똑했지만 병원을 다니느라 공부를 제대로 못했거든요. 얼마 전에는 학원을 보내달라고도 말하는 등 슬슬 학교 생활에 적응을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똥 냄새 난다' '넌 왜 이렇게 방귀를 자주 뀌니'라며 친구들이 가까이 오려 하지 않아 나영이가 힘들어 했어요. 그런데 편한 배변 주머니를 차고 다녀서 인지 요즘은 부쩍 밝아졌습니다. 친한 친구들은 나영이가 병원 때문에 조퇴를 할 때 마다 '나영이 감기 걸려서 그런 거야'라고 다른 친구들에게 대신 말 해준다고 합니다. 어린 아이들이 참 기특하지요. 도와주시는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글·사진= 김진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