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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동네서 34년 사랑의 인술… 파란눈 여의사의 한국사랑


[서울신문]“저녁 때는 녹초가 돼요. 하지만 웃음을 되찾은 환자들을 보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람을 느낍니다.” 18일 오전 기자가 찾아간 서울 시흥5동 전진상(全眞常)의원. 60㎡ 남짓한 환자대기실에는 아침 일찍부터 찾아온 환자들로 북적댔다. 걱정스럽고 초조한 눈빛의 환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파란눈의 여의사’부터 찾는다. 큰 병원에 갈 만한 형편이 안 돼 이곳을 찾은 ‘판자촌’ 주민들은 그녀를 한가족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어두웠던 낯빛이 밝아진다.

배현정(63) 원장. 벨기에 태생으로 본명은 마리헬렌 브라쇠르. 1975년 이곳에 정착해 34년째 달동네 주민들을 돌보고 있다. 배 원장은 오전 9시부터 가난한 환자들을 맞이한다. 그녀의 일은 단순히 진료만이 아니다. 환자들은 배 원장에게 가족, 진학문제까지 털어놓는다. 어떤 환자와는 30분 이상 얼굴을 마주하기도 한다. 그녀는 “주사만 놓는 의사가 아닌 가족환경까지 다 볼 수 있는 ‘진짜 의사’가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아프면 누구나 올 수 있는 곳”

날마다 수십명의 외래환자를 맞아 피곤할 법도 한데 저녁이 되면 호스피스병동의 말기환자와 가족들을 돌본다. 배 원장은 “해외에서 도착하는 성금 관련 업무와 빈곤층 아동기금 등의 복지사업 업무까지 도맡아 하기 때문에 일을 마치면 새벽 2~3시가 넘기도 한다.”고 말했다. 배 원장은 “아프면 누구든지 올 수 있는 곳을 만드는 것이 마지막 목표”라며 미소를 띤다. ‘환자에게 받은 가장 뜻깊은 선물이 뭐냐.’고 묻자 “어느 크리스마스날 도착한 마늘”이라고 말한다. 30여년 전 병환이 있는 친정어머니와 가족을 돌보던 한 중년여성이 배 원장에게 감동해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신문에 곱게 싼 마늘 한 접을 감사의 선물로 보냈다고 한다. 배 원장은 벨기에에서 간호사로 일하다 봉사단체인 국제가톨릭형제회에 입회한 뒤 1972년 우리나라를 찾았다. 수녀인 그녀는 1975년 고 김수환 추기경의 추천으로 이불보따리와 노란 냄비 하나만 달랑 들고 ‘전진상 가정복지센터’를 차렸다. 의료봉사자의 도움을 받는 것에 한계를 느낀 배 원장은 1981년 중앙대 의대에 편입, 5년 만에 가정의학과 전문의 자격증을 땄다.

●극빈층 무료 진료·생계비 지원

매달 생활형편이 어려운 200여명에게는 진료비를 한푼도 받지 않고 있으며 50명에게는 무료 왕진도 해준다. 해마다 50명의 중·고교생에게는 장학금을 주고 있다. 무료 유치원과 공부방도 만들었다. 일부 주민에게는 생계비와 양육비도 지원해 주고 있다. 배 원장은 25일 서울아산병원 내 아산교육연구관 강당에서 열리는 제21회 아산상 시상식 대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1억원의 상금과 상패가 수여된다.

정현용기자 junghy77@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