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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나 칼럼] "더, 더, 가슴으로 연주하세요"

 

모든것 바쳐 자신 내면 드러낸
번스타인의 고뇌와 정열 존경
장한나·첼리스트
▲ 장한나·첼리스트
 
올해 탄생 90년을 맞은 지휘자이자 작곡가 레너드 번스타인(Bernstein·1918~1990)의 첼로 협주곡을 지난달 런던 BBC 프롬스 음악 축제에서 처음 연주했다. 음악적으로나 교육적, 또 인간적으로 번스타인의 끝없이 넘치는 열정과 사랑에 푹 빠진 지는 오래됐지만, 그의 작품을 직접 연주한 건 처음이었다.

프롬스 축제만의 독특한 특징은 5000석 가까운 로열 앨버트 연주홀에서 평상시 가장 비싼 값을 부르는 무대 바로 앞좌석들을 다 빼내고, 대신 그 자리를 서서 들을 수 있는 가장 싼 표로 팔아 많은 사람들이 부담 없이 좋은 자리에 서서 연주를 들을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연주자는 자신의 바로 눈앞에서 누구보다 숨을 죽이고 서있는 청중에게 감동할 수밖에 없다. 동그랗고 커다란 공연장 내부의 발코니마다 내걸린 빨간 커튼마저 없다면 마치 대형 투우장에서 목숨 걸고 연주하는 것 같은 느낌이 된다. 오죽하면 무대 뒤에서 무대까지 가는 짧은 복도를 '황소가 달리는 길'이라는 뜻으로 '불 런(Bull Run)'이라고 부를까.

이런 클래식 음악 축제에서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를 위해 남달리 노력했던 번스타인의 음악을 연주하게 되어 매우 기뻤다. '세 명상곡(Three Meditations)'으로 불리는 이 첼로 협주곡은 지금은 거의 연주되지 않는 잊혀진 작품이다. 악보를 처음 보았을 때 "이렇게 끝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을 안 할 수 없었다. 아주 커다란 물음표를 던지는 듯이 끝나기 때문이다. 이 협주곡은 번스타인의 '미사곡(Mass)'에서 추렸는데, 점점 형식화하는 종교를 벗어나 진정한 내적 평화와 진실된 믿음을 찾아 스스로의 마음을 돌아보는 작품이다. 평상시 '명상곡' 하면 듣기 좋은 은은하고 조용한 멜로디의 소품을 떠올리지만, 번스타인의 명상곡은 충격적일 정도로 격렬하고, 생각을 송두리째 흔들 만큼 솔직하다. 협주곡이 끝날 때 오히려 번스타인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참된 내적 평화와 믿음은 무엇이며 어떻게 찾느냐는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번스타인은 어느 누구 못지않게 진정한 평화와 믿음에 대해 평생 고민했던 음악가다. 그는 지휘자로서의 삶과 작곡가로서의 인생이 마음속에서 충돌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다른 사람의 음악을 자기 작품처럼 사랑하면서 지휘한 뒤에는 본인의 내면에서 다른 작곡가들의 소리를 비워내고 자기만의 소리를 창조하기 위해 긴 시간의 고뇌를 겪었다. 번스타인은 자주 "음악이 나한테 오질 않는다"며 하루종일 또는 밤새도록 피아노 앞에 앉아 담배를 태우며 고통과 고요 속에서 음악이 오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리허설 때 땀을 뻘뻘 흘리며 단원들에게 "더, 더 가슴으로 연주하세요. 이 음악은 당신의 모든 것을 바칠 가치가 있습니다"라고 소리치는 모습에서, 그가 자신을 아끼지 않고 본인의 내면을 환하게 드러내며 나누는 음악가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다.

동시에 번스타인은 엄청난 지식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가 남긴 학구적인 하버드 강의들, 여러 수필들, 또 그런 지식을 독특한 그만의 유머로 감싸며 13년 동안 진행한 53회의 청소년 음악회를 통해 해박한 지식을 지닌 학자 번스타인을 볼 수 있다. 그의 청소년 음악회는 40개국에서 방송되면서 젊은이들에게 클래식 음악을 접근하기 쉽게 안내했다. 세 명상곡의 마지막 음을 연주할 때는 마치 번스타인이 나에게도 묻는 것 같았다. 음악가로서 달성하고 싶은 모든 것에 도전할 만큼 내 자신에게 평화와 믿음이 있는지…. 번스타인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닮고 싶은 멋진 음악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