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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딜러 [중앙일보]

 

두둑한 배짱, 칼같은 판단
매일매일 총성 없는 전쟁
대부분 사내 공모 통해 뽑아
경제 지식·외국어 실력은 필수

일러스트레이션=강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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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등락을 반복하던 모니터 속 그래프가 움직임을 멈췄다. 서울 외환시장에서 외환거래가 끝난 것이다. 외환은행 김두현 차장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는다. 머릿속이 멍하고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순간의 판단 실수로 수십만 달러를 잃을 수 있는 게 외환거래예요. 매일 총성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끊임없는 긴장 속에 때론 화장실에 갈 틈조차 없이 바쁜 일과를 보내니 외환딜러란 직업은 고약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도 각 은행의 외환딜러 공모엔 지원자가 넘쳐 매번 치열한 경쟁이 펼쳐진다. 고되고 바쁘긴 하지만 외환딜러란 직업이 가져다주는 과실은 크고 달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금융시장에선 이미 ‘외환딜러=엘리트’란 등식이 자리 잡았다.

◆높은 진입 문턱=한국금융연수원이 실시하는 자격시험 중엔 외환전문역·국제금융역 등 외환딜러와 관련된 자격증이 있다. 하지만 이런 자격증이 있다고 외환딜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외환딜러가 되려면 외국환 업무 기능이 있는 국내 은행이나 외국 은행의 국내 지점, 종합금융사, 증권사에 취업하는 게 가장 빠른 길이다. 물론 국내외 경영대학원(MBA) 과정을 마친 뒤 외환딜러로 취업할 수도 있지만 과거 외환 관련 업무 경력이 없다면 기회를 얻기가 쉽지 않다.

은행이나 증권사에 취업하기도 어려운데, 거기서 경쟁을 뚫어야만 외환딜러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쉽지 않은 관문이다. 국내 은행들은 매년 한두 차례 입사 4~5년차 직원 대상의 공모를 통해 외환딜러를 선발한다. 업무평가, 영어 구사 능력, 해외 체류 경험, 외환 등 경제 전반에 관한 지식 등이 평가 기준이다.

우리은행의 외환딜러 선발 방식은 독특하다. 2006년부터 외환딜러 희망자들로 구성된 동호회를 만들어 회원 중 딜러를 선발한다. 연간 두 차례에 걸쳐 한 달 보름가량 진행되는 모의 투자대회 성적 등이 선발 기준이 된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지원자가 많다 보니 기회를 공평하게 주자는 생각에서 선발제도를 바꾼 것”이라고 말했다. 각 은행이 새로 선발하는 딜러는 한 해에 네댓 명에 불과하다.

◆대접받는 전문가=딜러로 선발됐다고 당장 실전에 투입되는 것은 아니다. 회사마다 다소 다르지만 1년 가까이 국내외 연수과정을 거치고, 외환업무 지원 부서나 국제금융 부서에서 일하며 감각을 익힌다. 외환거래를 담당하더라도 초기 몇 년간은 매매와 손실 한도가 제한되는 주니어 딜러 시절을 거쳐야 한다. 여기서 실력을 인정받으면 하루 매매 한도가 1억~2억 달러에 이르고, 기업이나 개인이 주문하는 거래를 처리할 수 있는 선임 딜러가 된다. 선임 딜러는 시중은행이라 할지라도 한두 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일단 좁은 문에 들어서고 나면 드넓은 대지가 기다린다. 한 외국계 은행 외환딜러는 “ 환율을 매개로 외환을 거래하는 딜러는 국내외 경제 현상과 향후 전망에 대한 나름의 견해를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고 말했다. 금리·주가·경기는 물론 국내외 경제정책과 그에 따른 경제상황의 변화를 소상히 꿰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때론 도쿄· 뉴욕·런던 등지의 외환시장에서도 거래를 해야 하기 때문에 외국어 구사 능력도 딜러가 갖춰야 할 자질 중 하나다.

이처럼 경제적 지식과 외국어 실력으로 무장돼 있다 보니 외환딜러가 금융시장의 엘리트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국내에선 달러에 대한 수요가 가장 많기 때문에 은행마다 달러 거래 딜러가 가장 많다. 그 외에 유로나 일본 엔화를 거래하는 딜러, 통화·금리 스와프를 거래하는 딜러 등이 있다.

다만 딜러로 일할 수 있는 기간이 길지는 않다. 신한은행 홍승모 차장은 “업무 강도가 여느 직종보다 세기 때문에 대개 40대 초반이면 일선 딜러에서 물러나 딜링룸 총괄 등 관리 업무나 국제금융·자금 파트를 맡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외환과 파생상품시장을 넘나드는 딜러들도 있다. 국내엔 원-달러 시장밖에 없지만 정부의 금융시장 활성화 정책에 따라 앞으로 원-엔화, 원-유로화 시장이 개설될 가능성도 있어 외환딜러의 역할과 활동이 지금보다 훨씬 강력해질 수도 있다. 외환딜러의 연봉은 성과급제가 적용돼 은행 내 다른 직종보다 10~20%가량 높은 경우가 많다.

김준현 기자
자료협조:인크루트 www.incruit.com


■선배 한마디
권우현 우리은행 트레이딩부 과장
“오전 6시부터 긴장 모드 … 실력만큼 체력도 중요”


 우리은행 트레이딩부에서 달러화 딜러로 일하는 권우현(35) 과장은 꿈을 이룬 행운아다. 무역학을 전공하면서 외환딜러의 꿈을 꿨고, 1998년 우리은행의 전신인 한일은행에 입사해서도 줄곧 외환딜러만을 생각했다. 그러나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초년병에게는 아예 외환딜러에 공모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고, 지점 근무를 하다 보니 준비도 덜 돼 있었다.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입사 후 4년이 지난 2002년 봄. 처음으로 사내 외환딜러 공모에 나섰지만 결과는 낙방. 그러나 그는 실망하지 않고 다시 도전해 그해 10월 꿈을 이뤘다. 이후 국내외 연수를 거쳐 2004년부터 주니어 딜러로 일을 시작했고, 2006년 10월에는 선임 딜러로 승진했다. 올해 초엔 기획재정부·한국은행·금융회사 등으로 구성된 서울외환시장운영협의회가 주는 ‘2007년 최우수 딜러상’을 받았다.

권 과장은 “외환딜러로 일하는 게 자랑스럽고 보람 있다”면서도 “때론 너무 힘들다”고 말한다. 오전 6시쯤 일어나보면 휴대전화에 해외 주요 외환시장에서 날아든 속보 문자만 200여 건이 쌓여 있다. 출근 후 거래에 앞서 각종 국내외 경제지표를 점검하고, 하루의 매매 전략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서울 외환시장이 끝난 이후 런던·뉴욕 시장에서 거래하느라 밤늦은 시간에 퇴근하는 일도 많다.

그래서인지 권 과장은 “외환딜러가 가져야 할 중요한 자질 중 하나는 체력”이라고 말했다. 촌각을 다투는 외환거래에서 체력이 소진된다면 판단력과 그에 따른 실행 능력이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경제지식과 영어 구사 능력도 뛰어나야 하지만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고선 훌륭한 딜러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권 과장이 체력 이상으로 강조하는 외환딜러의 덕목은 ‘윤리성’이다. 그는 “하루에 수억 달러를 거래하다 보면 큰돈을 벌 때도 있지만 큰 손실을 낼 때도 있다”며 “중요한 건 실수를 감추기 위해 손실을 은폐하다 보면 그게 습관이 되고, 결국 큰 파국을 불러올 수 있다”고 말했다.

김준현 기자, 일러스트레이션=강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