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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ert Einstein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 (1879~1955 )

가장 위대한 과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1879년 3월 14일, 남 독일의 오래된 읍 우름에서 태어났다.
알베르트는 내성적이고 순한 아이로 말을 배우는 것도 남보다 늦을 정도였다. 이와 같은 아인슈타인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인상을 준 것은 병으로 누워 있던 5세때에 아버지가 가지고 놀라고 준 나침반이었다. 아인슈타인은 흔들흔들 움직이는 자침의 배후에 사림의 힘을 훨씬 초월한 힘이 숨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장차 자연법칙의 탐구자가 될 밑바탕은 이미 이 무렵에 움트고 있었던 것이다. 만 6세가 된 아인슈타인은 국민학교에 입학했는데, 여기의 교육은 지나치게 규칙으로만 얽매고 기계적이어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10세 때에 입학한 군국주의인 김나지움도 중도 퇴학했다.
얼마 후 아인슈타인은 유클리드 기하학 책을 입수해서, 혼자 힘으로 그것을 독파했다. 이렇게 해서 아인슈타인은 16세 무렵까지는 미분, 적분을 독습 하였다. 이 무렵 그는 또한 베른시타인(Bernstein)의 통속과학대계를 읽기 시작하여, 자연의 온갖 현상과 법칙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스위스에서의 학생 생활
아인슈타인의 아버지의 사업이 다시 기울기 시작했기 때문에 1895년에 일 가족은 뮌헨을 떠나 이탈리아의 밀라노로 옮겨가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김나지움의 공부를 계속하기 위하여 혼자서 뮌헨에 남았는데, 얼마 안가서 다시 퇴학하고 가족의 뒤를 좇았다. 그와 동시에 당시의 독일 전체의 군국주의적인 풍조를 미워했던 아인슈타인은 독일의 국적을 버리고 말았다.
집안의 경제 상태는 좋지 않아서 아인슈타인은 빨리 직업을 구해야 했다. 그는 기사가 되기 위하여 스위스의 취리히에 있는 연방 공과 대학에 들어가려고 결심하였다. 그런데 김나지움을 중도 퇴학했기 때문에 학력 검정시험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시험 결과, 수학과 물리학은 뛰어난 성적이었는데 어학과 박물학의 성적이 좋지 않아서 아인슈타인은 낙방하고 말았다. 낭패한 그는 대학 학장의 권유로 아아라우의 주립 학교 상급반에 들어가 대학 입학 자격을 얻기로 하였다. 1895년 10월의 일이었다. 주립 학교에 들어간 아인슈타인은 그곳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는 공부에 열중하여 1년 후에는 무사히 졸업하여 연방 공과 대학에 입학할 수가 있었다.
연방 공과 대학의 선생 중, 훗날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을 기하학적으로 설명한 민코프스키(H. Minkowski)가 있었다. 후에 일반 상대성이론의 수식화를 도운 그로스만(M. Grossmann)은 이곡에서의 학우였다. 그런데 이 무렵부터 아인슈타인 자신의 흥미는 수학을 떠나 물리학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실험에 열중하여 대부분의 시간을 실험실에서 지냈으며, 나머지 시간은 하숙집에서 키르히호프(G.R. Kirchhoff), 헬름홀츠(H.L.F. von Helmholtz), 볼트만(L. Boltzmann)등의 저작을 탐독했다.
이 무렵 아인슈타인의 생활은 숙모가 보내주는 적은 금액만이 밥줄이어서 극단적인 절약 생활이었다. 그러나 그는 가난 속에서도 쾌활함과 친구들에 대한 성심만은 결코 잊는 법이 없었다. 또한 가끔 친구들과 함께 음악을 즐겼다. 그의 바이얼린 솜씨는 아마추어를 넘어서고 있었다.
학생 시대에 읽은 책 가운데서, 마하(E. Mach)의 《역학의 발전》은 아인슈타인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 책에 서술된 절대적인 시간이라든가 공간에 대한 마하의 비판은 훗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탄생시키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학생 시절의 아인슈타인은 자기자신의 독립된 사고를 소중히 하고, 결코 권위에 맹종하지 않는다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었다. 교수들 가운데는 이 태도를 건방지다고 느껴 아인슈타인을 좋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1900년 봄에 연방 공과 대학을 졸업했을 때 조교로서 대학에 남아 연구에 전념하고 싶다는 아인슈타인의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은 그와 같은 교수들의 반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허국의 기사
대학의 조교가 되지 못한 아인슈타인은 숙모에게서 송금도 끊어졌기 때문에 한동안은 어렵고 막막한 생활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1901년 봄 부터는 공업학교 선생과 가정교사 자리를 겨우 얻었지만, 그것도 일시적인 것이었다. 1902년 6월에 이르러 비로소 친구 그로스만의 아버지의 주선으로 베른에 있는 스위스 특허국에 안정된 자리를 얻을 수가 있었다.
1901년 2월에 아인슈타인은 스위스의 시민권을 얻었다. 스위스의 민주주의와 자유의 전통이 아인슈타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그는 후에 미국으로 이주한 다음에도 죽을 때까지 스위스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 특허국 기사로서의 아인슈타인의 일은 특허의 신청서를 보고 그것이 특허할 만한 값어치가 있는지 어떤지를 판단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복잡한 문제 속에서 그 핵심을 집어내는 재능에 특히 뛰어났던 아인슈타인에게는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정해진 일을 아주 짧은 시간에 해 치우고 나서 나머지 시간은 느긋하게 물리학의 근본 문제에 관한 사색에 충당할 수가 있었다.
이 무렵 아인슈타인은 몇몇 친구들과 함께 물리학이나 철학에 관한 책을 읽고 서로 토론하는 모임을 계속 갖고 있었다. 이 모임에서의 진지한 토론 속에서,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의 기초적 문제에 관한 사색을 깊이하고 있었다.
1905년에 아인슈타인이 발표한 3개의 논문은 모두 19세기의 물리학자들이 여러 가지로 노력했는데도 불구하고 미해결인 채로 남겨져 있던 어려운 문제를 풀어헤쳐 물리학의 역사에 새로운 길을 열어준 위대한 업적이었다.
첫째는 브라운 운동의 이론으로, 이에 의하여 분자의 존재와 분자의 열 운동을 실험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 분자).
다음은 빛이 입자(알갱이)와 같은 성질을 지닌다는 광량자의 생각을 서술한 논문인데, 1900년에 플랑크(M.K.E.L. Planck)가 주창한 양자간설을 더욱 발전시켜 양자학에의 길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상대성이론을 확립한 논문이다. 뉴턴의 시대 이래 사람들의 머리 속에 배어 있던 시간·공간의 개념을 밑바닥부터 뒤집어 엎음으로써, 전세기의 80년대부터 물리학자들을 계속 괴롭혀 오던 문제를 일거에 해결한 것이다. 이 이론에서 '질량과 에너지의 E=mc2이라는 식에 따라, 서로 옳기고 변할 수가 있다'라는 결론이 얻어진다(E는 에너지, m은 질량, c는 진공 속에서의 빛의 속도). 후에 원자럭의 해방의 열쇠가 된 것은, 바로 이 결론이었다.
명 성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한동안은 학계의 주목을 끌지 못하였다. 이름도 없는 특허국의 청년 기사의 논문의 가치를 처음으로 인정한 것은 플랑크였다. 플랑크는 1907년에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더욱 발전시켜, 그 중요성을 세상에 알렸던 것이다. 이것을 계기로 많은 물리학자들이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둘러싸고 토론을 하였고, 1908년에는 질량이 속도와 더불어 변화한다는 상대성 이론으로부터의 결론이 실험적으로 확인되었다.
이리하여 아인슈타인은 마침내 학교의 인정을 받게 되어, 1908년에 베를린 대학의 강사가 될 수 있었다. 그 후로 급속히 명성이 올라감에 따라 아인슈타인은 여기저기의 대학으로부터 경쟁적으로 초청을 받기에 이르렀다. 1090년에는 취리히 대학의 이론 물리학 교수가 되고 1911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 대학에 이론 물리학 교수로서 초빙되었다. 그 이듬해 10월에는 모교인 연방 공과 대학의 교수가 되어 다시 취리히로 돌아왔으나 그것도 1년 남짓, 베를린의 프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와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로부터 파격적인 대우로 초빙되어, 1914년 봄에 베를린으로 옮겼다. 이 때 독일제국은 아인슈타인에게 프러시아의 명예 시민권을 증정.
이 무렵 아인슈타인은 1905년의 이론을 더욱 발전시킨 일반 상대성 이론을 만들어 내려고 피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베를린의 생활은 물질적으로는 후대를 받고 있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즐거운 것이 못되었다. 독일 전체를 뒤덮고 있던 군국주의-그것은 1914년에 시작된 제1차 세계 대전에 의하여 더욱 기승을 부렸다-와, 베를린의 아카데미와 대학에 충만해 있던 거만스러운 형식주의, 이런 것들은 무엇보다도 자유와 민주주의를 사랑하며, 누구에 대해서도 솔직함을 잃지 않았던 아인슈타인에게 있어서는 참기 어려운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베를린으로 옮겨 온 다음 얼마 안 가서 부인과의 이혼이라는 마음의 상처를 입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과학상의 이론 중 가장 추상적이고 가장 정교하게 받아 올려진 일반 상대성 이론을 끈질기게 건설해 나갔던 아인슈타인의 의지의 힘과 두뇌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15년에 완성. 이 이론은 빛의 진로가 강한 중력의 장 속에서 굽어진다는 것을 예언. 이 예언이 옳은지는, 개기 일식 때에 태양 바로 옆에 보이는 별의 위치를 측정하면 확인할 수 있다. 만약 별에서 나오는 빛이 태양의 중력으로 굽어진다면, 별은 평소의 위치에서 어긋나 보일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얼마 안 된 1919년 5월 29일에 그것을 확인할 기회가 찾아왔다. 영국의 학자들은 개기일식의 관측대를 파견했다. 그 관측 결과는 신중히 검토 되었으며, 아인슈타인의 이론적 예언은 옳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 사실이 발표되자 온 세계는 발칵 뒤집혔다. 학자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뉴턴의 권위를, 뒤덮어 놓은' 위대한 과학자로서 아인슈타인의 이름은 일반 사람에게도 급격히 널리 알려지게 되어 신문 기자들이 몰려들고 편지가 마구 쏟아져 들어왔다. 1921년에는 노벨 물리학상이 수여되고, 이 때부터 이듬해에 걸쳐서, 프랑스·미국 영국·남아프리카·일본등에 초청되어 강연을 했으며 각지에서 대중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명성에 누구보다도 곤혹을 느낀 것은 아인슈타인 자신이었다. 그는 과학의 연구를 위해서는 조용히 내버려 두는 것이 제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업적을 우연히도 귀중한 보석을 찾아낸 것과 같다고 생각하고 겸손한 마음, 타고난 소박성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 그와 같은 태도가 또한 대중의 아인슈타인에 대한 경애의 감정을 더해 주었던 것이다.
압박에 항거하여
아인슈타인의 마음 밑바탕에는 세상을 멀리하고 혼자 있고 싶은 심정과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책임감이 늘 공존하고 있었다. 그는 인간의 자유와 평화를 위협하는 사건이 일어날 때마나 강력히 그에 항의하곤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얼마 후에, 독일의 학자들과 작가들이 호전적인 선언을 발표했을 때 아인슈타인은 즉각 다른 평화주의자들과 함께 반대 성명을 내었다. 대전 후 여러국민의 상호 이해를 더할 목적으로 국제연맹 산하에 지적협력위원회가 만들어졌을 때에는 위원의 한사람으로서 열심히 노력하였다,
이 무렵 아인슈타인은 유태인 문제를 위해서도 헌신적인 노력을 시각하였다. 그는 유태인의 가정에 태어났지만, 타고난 자유를 숭상하는 정신 때문에 유태교의 계율과 유태인 사회의 전통적인 습관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에서는, 패전의 원인이 유태인의 음모라는 유언비어가 전파되어 유태인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아인슈타인은 유태인 압박의 부당함을 끈질기게 호소하였으며, 1921년에는 유태 민족주의의 지도자 와이즈만(C. Weizmann)과 함께 유태인 구제 기금을 모금하기 의하여 미국에서 강연 여행을 하는 등 정력적으로 활동하였다.
이와 같은 아인슈타인의 사회활동은, 그것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의 적의를 불러일으켰다. 1920년경 부터 반 유태주의자들로부터 공격이 시작되었다. 나중에는 상대성 이론까지도 아인슈타인이 수립했다는 이유로 유태적인 사이비 과학이라고 몰아붙이기에 이르렀다.
아인슈타인의 평화주의도 공격의 과녁이 되었다. 그가 1925년에 의무적인 병 역에 반대하는 성명에 서명했다는 사실은 아인슈타인을 적시하는 사람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이 무렵 아인슈타인은 암살을 염려 해야만 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굽히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1933년 1월에 히틀러(A.Hiller)가 정권을 잡자 군국주의와 반 유태주의는 한층 더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여 많은 유태인 과학자는 연달아 추방되고, 국외로 망명하기 시작했다. 아인슈타인은 그 전 해에, 초청을 받아 미국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다시 독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는 "개인이 법 앞에서 평등히 다루어지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가르칠 자유가 보장되지 않은 나라에서 살기를 원치 않는다"라고 항의하고, 베를린의 아카데미로 사표를 보내버렸다. 히틀러의 정부는 아인슈타인의 시민권을 박탈하고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그에게 5만 마르크의 현상금을 걸었다.
미국에서의 생활
독일에서 추방된 아인슈타인을 따뜻하게 맞아들인 곳은, 미국의 프린스턴에 새로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되는 고급 연구소였다. 아인슈타인은 여기의 종신 연구원으로서 오로지 연구에 전념하게 되었다. 프린스턴 거리의 조용한 환경과 연구소의 차분한 분위기는 아인슈타인의 마음을 깊이 위로해 주었다.
여기서 아인슈타인은 1929년경부터 시작하고 있었던 통일장이론을 다시 시작하였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중력을 공간의 성질로 설명한 이론이라 할 수 있는데, 전자기장의 이론은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이 전자장을 중력과 똑같이 공간의 성질로서 통일적인 이론을 만들어 내려는 것이 통일장 이론의 연구이다. 아인슈타인은 죽을 때까지 끈기있게 연구를 계속하여, 죽음 직전에는 커다란 자신을 가진 이론을 완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진정한 해결에는 아직 먼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인류를 파멸에서 구하기 위하여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우라늄의 핵분열이 발견되었다. 이 뉴스를 들은 아인슈타인은, 만약 나치스 독일이 이것을 무기로 이용하는 데 성공한다면 어떤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진심으로 걱정했다. 그것을 막는 단 하나의 방법은 '연합국에서도 원자 폭탄의 가능성을 미리 연구해 두는 일이다'라고 생각한 아인슈타인은 루즈벨트(F.D. Roosevelt)대통령에케 편지를 썼다. 이 편지는 채택되어 미국의 원폭 제조계획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착실히 진전되어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 직전에는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다.
이것은 아인슈타인에게는 생각 밖의 일이었다. 나치스가 원자폭탄을 갖는 것을 막는 것만을 염원하고 있었는데, 미국의 손으로 원자폭탄을 인간 위에 던지다니! 깊이 책임을 느낀 아인슈타인은 원자 무기를 없애기 위하여 생애의 마지막 날까지 끈질긴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날로 격심해져 가는 핵무기 경쟁을 우려하고, '아인슈타인이 죽음의 직전에 영국의 철학자 러셀(B.A.W Russell)과 의논해서 발표한 성명에는 세계 각국의 저명한 과학자 11명이 서명했으며, 전쟁 회피를 위하여 각국의 과학자가 의견을 교환하는 모임인 <패그워시회의 >의 계기가 되었다.
마지막까지 위대한 과학자인 동시에 인류의 운명에 깊은 관심을 계속 품고 있던 아인슈타인은 1955년 4월 18일에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아인슈타인에 대한 책을 읽은 이후로 정말 많이 말해왔던 내용이 하나있다.

사람들과 이야기 하다가, 혹은 엄마와 이야기 하다가 집중력이나 몰입, 건망증? 이런것에 대해 말할 때마다 참 많이도 얘기했던 것 같다.

아인슈타인은 평생 버스를 탈 때마다 버스비를 기사에게 물어봤고,
그리고 버스를 내릴 때 까지 거스름돈을 제대로 받았는지 계산을 했다고
한다

이것은 아인슈타인이 얼마나 본인의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는지 함축적으로 알 수 있는 삶의 태도이다.

자신의 그 목표에 몰입으로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본인이 말하기에 본인이 뛰어나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 누구보다도 그것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고 한다.
생각이란 표현보다는 하루종일 모든 시간에 그것에 빠져있었고 그 부분에 있어서는 확실했다고 말했다.

몰입이란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위대한 재능이자 잠재력이며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