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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Alva Fdison


에디슨
 
Thomas Alva Fdison (1847~1931)

발명과 그 실용화를 위해서....



  ●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
  토마스 알바 에디슨은 1847년 2월 11일, 미국 오하이오 주 밀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네덜란드 계, 어머니는 스크틀란드 출신이다. 7세 때, 가족이 미시간 주 포트할론으로 옮겨가, 에디슨은 그 고장의 국민학교에 다녔는데, 겨우 3개월 만에 퇴학하고, 주로 어머니에게 교육을 받았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으므로 12세 때에 철도의 신문팔이가 되었고, 15세 이후에는 철도 전신수가 되어 미시간 주의 아드리안을 비롯하여 인디애너폴리스, 신시내티, 디트로이트, 뉴올린즈, 보스턴 등지를 옮겨 다녔다. 그 동안, 틈만 나면 여러 가지 실험 기구를 사 모아, 과학 실험에 열중하였다.
  그 무렵의 미국은 1861년에 일어난 남북 전쟁을 경계로 하여, 여러 가지 산업이 새로이 발전하고 있었다. 약 20년정에 발명된 모르스(Samuel Finley Bresse Morse, 1791∼1872)의 전신도 실용화되기 시작하여, 전신수가 많이 필요해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시대에 에디슨은 전신수가 되고자 전신술을 배웠던 것인데, 그것은 동시에 자신이 발명가로서의 생애에의 제1보를 내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동안, 그는 보스턴에서 패러디의 ≪전기학의 실험적 연구≫라는 책을 읽고 커다란 자극을 받았다. 그리고 그 책의 설명이 명쾌한 데다가, 복잡한 수식을 별로 쓰지 않고 있는 데에 매우 흥미를 느껴, 이 책에 나와 있는 실험을 하나하나 살펴보기도 하고, 실지로 해보기도 하였다. 그 밖에 이 무렵에 화학의 실험과 전신의 연구도 했다.
  이리하여, 얼마후 1868년에 전기식투표 기록장치를 발명하였으며, 최초의 특허를 얻었다. 이 기계는 너무나도 정확하고 편리했기 때문에, 도리어 연방의회에서는 채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어서 주식 시세 수신기와 전신의 새로운 송신 방법 등의 발명도 했는데, 전신 사업의 자본가들이 너무도 돈벌이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데 환멸을 느끼고, 전신 방면의 연구는 단념해 버렸다. 그리고 그가 발명한 유니버살 인쇄기로 얻은 자금으로, 1870년에 뉴저지 주의 뉴아크에 공장을 열고, 발명에 전념하였다. 1876년 초, 가족들의 건강과 일하는데 편리한 점 등 때문에 뉴욕 근교의 작은 마을 멘로우파크로 옮겨가, 사는 집 옆에 공장과 실험소를 지었다(그리고 1887에는 뉴저지 주의 웨스오린지로 이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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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기의 개량
  같은 1876년 3월, 벨(Alexander Graham Bell, 1847∼1922)은 전화를 발명하여 특허를 얻었는데, 그것은 뉴욕, 워싱턴간(약 330㎞)의 통화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 사실을 전해듣자, 에디슨은 즉시 그 얼개를 살펴본결과, 그 결점이,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전자석식의 수화기와 똑같은 얼개의 것을 송화에도 쓰고 있는 점에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그 개량에 고심하였다. 그리고 탄소판을 음성 자동판과 고정 금속판 사이에 끼워 놓고, 음성 진동판의 진동에 의해서 일어나는 아주 작은 압력의 변화에 의하여, 사이에 끼운 탄소판의 전기 저항에 큰 변화가 일어나도록 궁리했다. 그리고 이 송화기에 대고 말을 할 때, 음성에 따라 생기는 송화기 속의 저항의 변화에 의하여 볼타(Volta)의 전지에서 나오는 전류를 변화시켜, 이것을 유도 코일로 확대해서 수화기에 도달하도록 했다.(1877년).
  이 방법은 벨의 최초의 방법(벨 자신도 그 후 여러 가지로 개량하였다)보다는, 훨씬 원거리의 통화가 가능한 것이었다. 에디슨의 이 방식도 얼마 후에 나타난 우수한 여러 가지 개량에 의해서 바뀌었지만, 그가 탄소를 사용하여 그 저항의 변화를 이용했던 것은, 전화기에 하나의 새로운 방향을 열어 준 것으로서, 커다란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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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음기의 발명
  같은 해에 에디슨은 축음기를 발명하였다. 이것은 탄소 송화기의 연구와 자동 전신기의 실험에서 힌트를 얻어 생각해 맨 것으로서, 이에 관하여 에디슨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무리 작은 바다 물결이라도, 잔물결이 나아갈 때에 생기는 곡선의 표지를, 해안의 모래에 정확하게 그리고 있는 데에 우리는 놀라움을 느낀다. 그리고 모래알을 유리판이나 매끄러운 나무 널빤지에 얇게 뿌려서 피아노 위에 놓으면, 소리의 진동에 따라서 여러 가지 직선과 곡선이 나타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들 예에서, 고체의 잔 알갱이가 액체나 기체나 소리의 약한 물결에도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현상은 이전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사람이 내는 소리의 물결도 바다의 물결이 모래사장에 표지를 만드는 것과 똑같은 표지를 어떤 물질에 부여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내가 생각해 낸 것은, 겨우 몇 년 전의 일이었다."
  에디슨은 전신의 중계기로서 사용할 목적으로 모르스 부호가 종이 테이프 위에 흔적을 내고, 그 흔적이 다시 발신기로 들어가서 모르스 부호를 발신하는 것과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종이 테이프의 흔적이 모르스 부호의 소리를 재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러 가지로 고심 끝에, 주석 박을 원통에 붙이고, 여기에 소리의 진동을 흠으로 새겨, 거기에 바늘을 대어 소리를 재생하는 축음기를 발명하였다. 일단 이와 같이 해서 성공하자, 그는 적극적으로 그 개량에 고심하였다. 그리고 원통 모양의 레코드로부터 원판 레코드가 되기까지, 축음기의 발명 개량에 대해서 얻은 특허는 100가지를 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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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의 발명
  당시 어느 정도 실용적인 전등이라면, 2개의 탄소 막대 사이에 아크 방전을 시키는 아크등 밖에 없었는데, 이것은 탄소 막대가 얼마 안 가서 다 타버리기 때문에 끊임없이 바꾸어 주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또한 옥외 전등으로서는 어느 정도 쓸모가 있었지만 옥내에서는 빛이 너무 강한 데다가 누이 부셔서 눈에도 해로웠다. 30여 년 전에, 도선에 전류를 통하면 열을 발생하고, 융점이 높은 도선이라면 백열시킬수 있다는 것이 밝혀진 이래, 발명가들은 옥내용의 전등을 만들고자 여러 가지 고안을 해 왔는데, 실제로 쓸모있는 백열 전등을 만드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무렵에는 전등용의 가열 물질로서 탄소를 사용하는 것이 첩경이라는 사실을 이미 많은 연구자들이 알고는 있었지만, 가공 물질의 가공에 곤란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가열할 때에는 이것을 진공 속, 혹은 적어도 산소를 포함하지 않은 기체속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어려운 문제도 있었다. 그리고 가느다란 탄소 막대를 이 목적에 사용하려고 시도한 몇 사람의 연구자도 있었다.
  이와 같은 상태 속에서, 에디슨은 1878년에 이 연구를 시작한 것이다. 그는 가느다란 탄소 막대를 사용하지 않고 가열 물질을 먼저 필라멘트(선조 모양으로 만든 다음, 그것을 탄화하려고 시도했다. 처음에 시험한 것은 탄화한 종이였는데, 당시 제작되고있던 진공펌프로 얻은 진공구 속에서는 아직 충분히 산소를 제거할 수 가 없어, 이 필라멘트는 10여 분 동안 빛을 낸 데 불과했다. 그래서 한때는 금속 필라멘트를 고안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여의치 않아서 다시 탄소로 돌아가, 종이 대신에 무명실을 탄화하였으나 수없이 실패를 거듭하였다. 이리하여 간신히 1879년 10월 21일에 하나의 탄소 필라멘트를 만들어, 40시간 이상이나 계속 빛을 발하는 전구를 만들 수가 있었다.
  이에 힘을 얻어, 좀 더 좋은 필라멘트의 재료를 찾은 결과, 1880년에 대나무가 가장 좋다는 것을 알아내어 대나무 가운데서도 제일 알맞은 것을 찾아내는 d에 착수하였다. 그래서 10만 달러나 소비하여, 대나무의 산지로 알려진 중국, 일본, 말라이 제도, 인도, 중앙 아메리카 및 남아메리카 등의 각지에 사람을 보내어 여러 가지 재료를 수집했는데, 마침내 일본 교토 부근의 야와타 에서 나는 대나무가 가장 좋다는 것을 알았다. 그 후 약 10년 동안, 이 대나무가 백열 전등의 필라멘트로서 사용되었다.
  이와 같이 해서 최초의 실용적인 탄소 필라멘트 백열전구가 그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은 1880년이었는데, 이것을 점화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강한 전류가 필요해 졌다. 그러려면 효율이 높은 발전기의 제작, 배전반의 설계, 그 밖의 배전 방식의 설정, 적산전력계의 고안, 케이블 공사 등에서부터 전구에 부속된 TM위치, 소켓류, 퓨즈 등 일체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에디슨은 이와 같은 것들을 새로 만들어 내었을 뿐만 아니라, 전등 회사를 창립하여 그 선전 보급에도 힘을 써, 마침내 누구나 전등을 이용할 수 있는 데까지 이끌어 갔다. 이 사실은 매우 큰 업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말할 것도 없이, 위에 든 여러 가지 전기 기구의 제조도, 전기 기술의 빛나는 진보였다.
  이무렵(1883년), 그는 전구의 내부에 한 장의 금속판을 유리 구의 벽을 통해서 봉해진 철사로 받치도록 한 결과, 필라멘트가 직류로 백열되었을 때 이 판과 필라멘트의 양극 사이에 약한 전류가 흐르고, 음극과의 사이에는 전류가 흐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에디슨 효과라 불리고 있다. 이에 대해서 에디슨은 그 이상 깊이 파고들어가지는 않았고 또 실용화도 시도하지 않았지만, 20세기에 들어서자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이것이 열전자현상으로서 연구되어 라디오요 진공관에 응용되었으며, 다시 더욱 놀랄 만한 발명으로까지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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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의 발명
   영화의 촬영기와 영사기의 신고안(1891년), 자기 선광기의 발명(1891∼1900) 및 에디슨 전지의 발명(1900∼1910) 등이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후, 미국의 참전과 함께 한때 사업을 중단하고 미합중국 해군 고문 위원회 회장이 되어 군사 과학상의 문제에 전념했는데,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웨스트오린지의 실험소와 공장으로 돌아가서 정력적인 일을 계속하여, 자신의 발명품의 개량발전에 힘을 기울였다. 이 일은 그의 죽음(1931년 10월 18일)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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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명과 연구를 하는 태도
  발명과 그 실용화를 위해서 마음을 쏟았던 에디슨의 뛰어난 성질로서, ① 넓고 또한 공정하게 사물을 보는 눈과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는 것, ② 사물을 꿰뚫어 보는 힘이 뛰어났다는 것, ③ 자신의 일에 대하여 확고한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④ 지칠 줄을 모르는 탐구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발명이나 발견을 진정으로 다한 사람은, 많건 적건 이와 같은 성질을 지니고 있었는데, 에디슨의 경우는 그것이 유달리 특출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그는 이른바 기술자 기질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비법하고 그리고 건강한 상식을 지니고, 그것을 기르기 위하여 널리 사람들과 사귀고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활약했던 시기가, 젊은 미합중국의 눈부신 비약의 시기였다는 것은, 그의 발명적 천재를 발휘시키는 데에 커다란 구실을 했다. 여기에도, 과학과 기술이 진보적 환경없이 키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하나의 증거가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