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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멘 가게 삿포로에만 천개, 내가 먹은 건...

[오마이뉴스 노시경 기자]
▲ 스스키노 거리. 삿포로의 대표적인 상업지역이자 번화가이다.
ⓒ 노시경

'밤의 거리'에는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총천연색 네온사인이 삿포로를 활력 있게 장식하고 있었다. 삿포로의 유명 맥주회사와 사케를 파는 술집의 네온사인이 밤을 밝히고 있었다.


▲ 밤의 스스키노 거리. 스스키노 거리는 술집과 식당의 네온사인이 화려한 밤의 거리이다.
ⓒ 노시경


나는 홋카이도(北海道) 삿포로(札幌) 스스키노(すすきの) 거리에서 무언가를 호객하고 있는 호객꾼에게 길을 물었다.


"실례합니다. 라멘 요코초(ラメン?丁)가 어디에 있습니까?"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거리의 호객꾼이라 답변을 잘 해줄지 의심되었지만 이 친구는 예상 외로 아주 친절했다.


"저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곳이 보입니까? 여기에서 대각선 방향에 있으니 저 네온사인을 보고 찾아가면 라멘요코초 간판이 보일 겁니다."


그는 스스키노 거리 대각선 방향의 한 모퉁이에서 빨간 네온사인이 빛나는 곳을 가리켰다. 나는 가족을 데리고 횡단보도를 두 번 건너 그 반짝거리는 간판 앞으로 갔다. 간판 앞에 서서 자세히 보니 간판에는 '삿포로의 명소, 라멘요코초'라는 붉은 일본어 네온사인이 빛나고 있었다.


라멘요코초는 골목이 작아서 길 찾기가 꽤 어렵다고 들어왔었다. 그런데 라멘요코초를 별 어려움 없이 금방 찾게 되자 마음이 놓였다. 나는 드디어 삿포로 라멘을 먹는다는 즐거움으로 서둘러 라멘요코초 안으로 들어서려고 했다. 그런데 무언가 찜찜하게 나의 시선을 잡아당기는 것이 있었다. 나는 무언가 이상해서 라멘 가게를 들어가려다가 말고 그 네온사인 간판을 다시 보았다.


▲ 신라멘요코초. 라멘 명품 거리인 라멘요코초 앞에 '신(新)'자가 교묘하게 숨어 있다.
ⓒ 노시경


라멘요코초의 네온사인 간판 앞에 무언가 한자 1자가 쓰여 있는 것 같았다. 그 한자는 붉은 네온간판 외곽을 장식하는 초록색 문양과 같은 초록색 글씨여서 마치 네온간판의 테두리같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보는 사람도 헷갈릴 정도로 흘려 쓴 '신(新)'자였다.


신라멘요코초(新ラメン?丁). 이곳은 라멘요코초의 바로 윗 블록에 위치한 신라멘요코초였다. 비교적 최근에 조성된 이곳의 라멘 가게 주인들이 이곳도 라멘요코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라멘요코초'라는 글씨만 잘 보이도록 네온사인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삿포로 라멘 가게에 대한 사전시식 없이 이 간판만 보았다가는 이곳이 오리지날 라멘요코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삿포로 라멘을 라멘요코초가 아닌 신라멘요코초에서 먹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신라멘요코초 라멘이 라멘요코초 라멘과 별반 다른 게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신라멘요코초는 위치상 라멘요코초가 확장된 개념으로 라멘요코초 길 건너에 만들어진 가게들이다. 이미 나와 내 가족은 스스키노의 온갖 가게들을 답사하느라 다리가 지쳐 있었고 눈앞에 보이는 모든 가게의 라멘들이 다 맛있어 보였다.


신라멘요코초 안으로 들어서니 온통 자기 라멘 가게가 원조라는 광고판들이 붙어 있다. 같은 거리의 식당마다 서로 원조라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나라만의 현상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곳 삿포로 한복판에서도 서로 자신의 식당이 원조라고 우기고 있었다. 나는 오랜 전통의 식당과 음식을 만드는 장인의 나라, 일본에서 이렇게 원조라고 주장하는 가게들이 난립한 것을 보고 적지 않게 놀랐다.


라멘요코초는 일본 삿포로 관련 여행 안내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삿포로의 명소이다. 이 거리는 우리나라가 전쟁 중이던 1952년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당시에 한 라멘가게의 주인이 이 거리에서 돼지고기 된장국을 팔고 있었다. 이 돼지고기 된장국은 가족과 떨어져서 살아가는 외로운 남자 손님들의 불규칙한 식사를 해결해 주는 주요 메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삿포로에서 홀로 살아가는 한 손님이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 이 돼지고기 된장국에 면을 넣어달라고 요청했다. 가게 주인이 손님의 부탁대로 면을 넣고 된장국을 끓이니 그 맛이 기가 막혔다고 한다. 이 라멘 가게의 주인은 이 된장라멘을 바로 손님들 앞에 내놓지는 않았다. 이 라멘의 장인은 그 후 된장이 들어간 라멘 연구를 거듭하여 1961년에 이 거리에 비로소 미소(된장) 라멘을 내놓게 되었다.


이 이야기대로라면 삿포로 명물인 삿포로 라멘의 원조가게는 한 곳이어야 하지만 모든 가게들이 자신의 가게가 원조라며 아우성이다. 게다가 많은 가게들은 자신들의 가게가 TV프로그램에 맛있는 가게로 선정된 곳이라며 자랑하고 있다. 이곳에는 원조가 되는 라멘가게만 약 30곳이나 성업 중이다. 가게마다 자신의 가게에서만 만들어내는 라멘의 특이한 맛이 있기 때문에 원조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일까?


라멘 가게들의 골목은 예상보다도 훨씬 비좁고 골목의 길이도 짧다. 골목이 너무 작아서 이 가게들을 처음으로 찾는 사람들은 주의 깊게 찾지 않으면 이 가게들을 한 번에 찾기도 힘들 것이다.


▲ 모구라 라멘가게. 방송에도 출연했던 삿포로 라멘 원조가게 중의 하나이다.
ⓒ 노시경


그리고 가게들의 크기도 한결 같이 작다. 식당 유명세로 인해 돈을 많이 벌게 되면 으레 식당도 넓게 하고 길도 확장했을 것 같은데 이 원조가게들은 수십 년 째 같은 장소에서 같은 크기의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이 작은 가게 안에 수십 년 동안이나 라멘의 맛만을 경쟁해온 장인들이 들어있는 것이다. 관광객들은 이 라멘 장인들이 만들어놓은 미각을 느끼기 위해 이 거리를 찾는다.


라멘요코초와 신라멘요코초의 가게들은 모두 저마다의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자신의 취향에 맞춰서 맛을 음미해야 하는 곳이다. 우리는 신라멘요코초 안의 라멘 가게들 중에서 우리가 들어갈 가게를 골라보기로 했다.


신라멘요코초 안으로 들어서니 작은 라멘 가게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며 붙어 있다. 나는 수많은 라멘 가게 중에서 '모구라(もぐら)'라는 라멘 가게를 골라서 들어갔다. NHK TV에도 출연한 삿포로 라멘의 원조라고 적혀진 가게였다. 가게 이름도 마치 맛있는 라멘을 들어와서 '먹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작은 가게 안의 좌석은 이미 관광객들로 가득 차 있고 나와 아내, 신영이는 주방장 앞의 테이블에 나란히 앉았다.


▲ 라멘가게의 중국인 관광객. 삿포로의 신라멘요코초 가게에는 외국 관광객들이 가득하다.
ⓒ 노시경

삿포로 라멘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중국인 손님들과 현지인들로 라멘집 안은 붐비고 있었다. 삿포로 라멘에 쏟는 이곳 라멘집 장인들의 일생에 걸친 노력을 인정하고 그것을 즐기려는 사람들이다. 가게 안 벽면에는 이 유명한 라멘가게를 다녀간 사람들의 사인이 이곳저곳에 가득하게 남아 있다. 이 가게는 마음 푸근한 맛집의 모양을 하고 있어서 먼 길을 찾아온 나를 만족스럽게 했다.


삿포로 라멘을 파는 가게들이 한곳에 모이면서 입소문이 나게 되었고 사람들이 몰리게 되면서 라멘 맛은 경쟁 속에서 더욱 더 개선되어 갔을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는 여행자 입장에서는 즐겁기만 한 일이다.


삿포로의 미소(일본식 된장) 라멘은 삿포로의 미소를 사용하기 때문에 다른 곳의 라멘보다 국물 맛이 아주 진하다. 우리는 이 가게에서 가장 자신 있는 메뉴라는 미소 라멘 2그릇과 함께 소유(간장) 라멘도 먹기로 했다. 미소 라멘 중에서는 돈코츠(豚骨)가 들어간 라멘, 소유 라멘으로는 옥수수 콘이 들어간 라멘을 주문했다.


▲ 모구라 가게 주방장. 수십년 동안 라멘만을 만든 라멘의 장인이다.
ⓒ 노시경


라멘집 주방장은 바로 우리 눈 앞에서 라멘 면발을 데치고 있었다. 그는 그릇에 국물을 가득 담은 후에 기름기가 빠진 삶은 찻슈(돼지고기 절편)을 올려서 라멘을 완성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잘게 썬 파를 라멘 위에 얹었다. 라멘이 만들어진 모든 과정을 바로 앞에서 지켜본 우리에게 바로 그 라멘이 건네졌다. 따뜻한 라멘 국물의 냄새가 강하게 전해져 왔다.


오! 그런데 라멘 그릇을 덮은 돼지고기 절편이 징그러울 정도로 많다. 돼지고기가 라멘 면발 뿐만 아니라 아예 그릇을 덮을 정도로 가득 담겨 있다. 일본 식당들의 음식 양은 풍족하지 못한 편인데 이 가게는 그릇의 공간이 부족할 정도로 그릇에 담긴 고기의 양이 많다.


▲ 미소라멘. 이곳의 된장라멘은 엄청나게 큰 돼지고기 절편이 특징이다.
ⓒ 노시경


라멘 맛은 담백해서 먹을만 하지만 절편 자체가 너무 커서 한입에 먹기도 힘이 들 정도다. 양도 많아서 다 먹기도 힘들다. 라멘 2그릇만 시켜도 될 뻔 했다. 한 그릇만 시켜도 2사람이 먹기에 부족함이 없는 양이다. 아마도 이 가게는 아낌 없이 고기를 제공하는 서비스를 내세우면서 성공한 가게인 것 같다.


기름기가 약간 느끼한 돼지고기 절편을 드디어 다 해치우고 나자 그 밑에서 라멘 면발이 나타났다. 달걀 노른자를 섞어 반죽한 면발은 아주 탱탱하고 두꺼웠으며 라멘답게 구불거리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면발을 씹는 맛은 꼬들꼬들했다. 인스턴트 라면이 아니기 때문에 천천히 먹어도 면발이 퍼지지 않았다.


▲ 소유콘라멘. 간장으로 국물의 간을 맞추고 옥수수를 얹은 라멘이다.
ⓒ 노시경


국물에는 작은 기름방울들이 떠 있어서 보기에는 약간 느끼해 보인다. 하지만 돼지 뼈를 넣고 아주 오래 끓여서인지 국물은 아주 진했다. 국물에는 돼지 뼈를 달인 진국이 담겨 있었다. 나는 이 훌륭한 면발과 진한 국물의 맛을 괜히 돼지고기 절편이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멘을 열심히 먹던 아내가 한 마디 했다.


"우리가 먹는 이 라멘, 삿포로에서 제일 유명한 라멘을 주문한 것 맞아? 들었던 소문만큼 맛이 아주 훌륭한 것 같지는 않은데?"


아내는 예상보다 라멘이 맛있지는 않다는 표정이다. 어린 신영이는 거대한 돼지고기 절편을 먹지도 못하고 라면 면발과 고명으로 얹혀 있는 옥수수만을 건져서 먹는다. 나는 본전 생각에 내가 주문한 라멘을 다 먹어치웠지만 아내와 딸이 주문한 라멘 2그릇은 아무래도 그 많은 양 중 상당한 양이 남을 것 같다.


마음 속으로는 무언가 찜찜한 생각이 자리를 잡았다. 라멘요코초 앞에 쓰여진 '신(新)'자를 내가 너무 가볍게 생각한 게 아닌가? 부근의 신라멘요코초 가게들이 서로 원조라고 주장들은 하고 있지만 원조의 깊은 맛은 이곳보다 역사가 더 오랜 라멘요코초의 긴 역사성 속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그 맛은 어떤 맛이었을까? 이 가게들의 라멘 맛과는 차별화되는 더 깊은 맛이 있었을까?


신라멘요코초와 라멘요코초에는 이 가게 외에도 칸류라멘(華龍ラ?メン), 만류라멘(?龍ラ?メン) 등 스스로 원조임을 뼈 속 깊이 자부하는 가게들이 30곳이나 있다. 삿포로에는 라멘 가게만 해도 천개가 넘는다. 이 라멘 가게들의 주방장들은 라멘대회 우승경력까지 다투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가게의 이 라멘 한 그릇으로 삿포로 라멘을 평가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돼지 뼈를 달인 진한 국물을 마음껏 들이켰다. 따뜻한 국물이 온 몸 안에 퍼지는 것이 느껴졌다. 삿포로 라멘은 된장이 들어간 깊은 국물 맛이 일품이었다. 다음에 내가 만약 삿포로에 다시 오게 된다면 그때는 홋카이도의 해산물을 가득 담은 미소 라멘을 먹어야겠다. 그때 나는 신라멘요코초에서 한 블록을 더 걸어 내려가서 라멘요코초로 들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