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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은 지금, 카펫을 걷어내고 온돌을 깐다

 

영국 상류층에 부는 오리엔탈 열풍

영국 런던에서 오리엔탈리즘은 더 이상 일부 계층의 전유물도, 편견 어린 시선을 받는 별난 취향도 아니다. 음식과 패션에서 불기 시작한 오리엔탈 바람이 건축과 인테리어, 생활양식에까지 파고들어 서구 세계의 심장을 사로잡고 있다. 오리엔탈 바람은 인도나 중동에 이어 중국·일본·한국 등 동아시아 문화권으로 옮겨가고 있다.

런던의 직장인들은 패딩턴 역 초밥 체인점에 들러 초밥을 햄버거처럼 출퇴근 먹거리로 애용한다. 사진=박정경


런던 중심부에 있는 패딩턴 기차역. 19세기 초 지어진 고풍스러운 역사(驛舍) 한가운데 회전초밥이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다.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유행 선구자인 캐리가 ‘우아하게’ 맨해튼 스시바를 탐험하던 게 몇 해 전이다. 하지만 패딩턴 역 초밥 체인점은 이제 가락국수나 햄버거처럼 바쁜 직장인들의 출퇴근 끼니로 애용된다. 두툼한 연어 살 서너 점을 따로 얹어 테이크아웃해 가는 영국 신사에게 ‘날생선이 괜찮으냐’는 질문은 난센스다. 기름진 튀김옷을 입은 ‘피시 앤드 칩스’보다 칼로리가 낮아 웰빙식으로 인식된다.

건강을 생각하는 영국인들은 그렇게 사랑한다는 카펫도 걷어내고 있다. 카펫은 아토피 피부염을 유발하는 집먼지 진드기의 온상으로 치부된다. 카펫 대신 청소하기 쉬운 나무로 된 바닥을 까는 집이 늘고 있다. 그러자 이번엔 다세대 주택 등에서 층간 소음 문제가 불거졌다. 서양인들은 실내에서도 신발을 신기 때문이다. 영국 공영방송 BBC 사이트에서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결론은 “카펫을 다시 깔자”가 아니라 “신발을 벗자”는 거였다. 글래스고에 사는 레슬리는 댓글에서 “천식을 앓는 가족이 있어 목재 마루로 바꾸고 싶다”며 “아래층 주인이 동의한다면 카펫을 걷은 다음 신발도 기꺼이 벗겠다”고 말했다.

집에서 신발을 벗는 영국인은 늘고 있다. 집을 구하러 다니던 기자가 맨발로 대문을 열어 주는 벽안의 남성을 신기해하자 부동산 중개인은 “아이 있는 집이 특히 그렇다”며 “집주인도 (집을 깨끗이 사용해) 그런 세입자를 좋아한다”고 귀띔했다.

①중국식 약방. ②동양식으로 장식된 응접실. ③매화 문양을 넣은 벽지 이미지. 홈앤북 제공
‘자연주의 삶’ 추구하는 조류와 결합
런던 서쪽의 산업 도시 슬라우(Slough). 2년 전 신축된 모자이크 아파트에는 서구인의 전통 난방 장치인 라디에이터가 없다. 요즘 집을 개조할 여력이 있는 부유층은 욕실부터 바닥 난방으로 바꿔나가는 추세다. 거기에다 일본산 편백나무로 짠 히노키 욕조까지 갖다 놓으면 그들이 선망하는 ‘자연주의 삶’이 완성된다. 바닥 난방이 한국의 온돌에서 기원한다는 사실을 웬만한 전문가라면 다 안다. 온돌은 영국 브리태니커 사전에 ‘on-dol’로 표기돼 ‘한국의 바닥 난방 방식’이라고 소개돼 있다.

웰빙과 친환경 생활양식을 추구하는 영국인에게 오리엔탈풍은 ‘자연스러움’과 통하는 동의어다. 인테리어 사업을 하는 클로이 앨버리(29)는 요즘 한국의 전통 민화를 소재로 한 벽지를 새 집에 바르느라 신이 났다. 버드나무에 제비가 날아가는 모습의 벽지는 민화 작가 윤인수의 작품을 원본으로 삼아 재영 예술제본가 김영신(39)씨가 개발했다.

앨버리의 남편은 “자연을 집 안으로 끌어들인 느낌”이라며 아내의 선택을 극찬했다. 앨버리 부부의 집은 침실에까지 벽난로를 들인 영락없는 서구식이다. 하지만 한국풍 벽지를 발랐다. “무척 잘 어울리며 평화롭고 편안한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고 부부는 말한다. 옛날 한국 서민들의 민화가 영국 상류층의 침실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게 참 묘하다.

이 집의 화장실과 욕실에는 일본에서 가져온 연꽃 무늬 타일 등을 붙여 오리엔탈풍을 강렬하게 전달하고 있었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에서 공수한 조약돌, 화석나무(fossilized wood), 마노(보석의 일종) 등으로 만든 문고리 역시 주인의 동양풍 취향을 드러낸다. 이들은 새로운 인테리어 디자인의 돌파구를 동양에서 찾고 있는 듯했다.

오리엔탈 제품은 희귀성 때문에 값이 퍽 비싸다. 동아시아 앤티크 사이트 ‘탄수(Tansu)’에선 일본 서랍장이 3250파운드(약 650만원)나 한다. 그런데도 제법 팔리는지 일본 교토에 이어 중국 베이징, 티베트, 몽골까지 수집 영역을 넓히고 있다. 런던 킹스 로드의 아시아 고가구점에는 문짝과 목 잘린 부처상, 뒤주 소반 등 없는 게 없지만 가격에는 상당히 거품이 끼어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오리엔탈풍을 좋아하지만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젊은층은 중국풍 가구 체인점 롬복(Lombok)을 찾는다. 근대 중국의 디자인에 미니멀한 현대 감각을 결합시킨 ‘상하이’ ‘베이징’ 라인 등을 론칭해 런던에서만 10개 매장을 운영 중이다. 언뜻 보면 현대식 가구 같지만 매끈하지 않은 질감과 실크 이불이 중국풍임을 짐작하게 한다. 무조건 단순하기만 했던 1990년대 젠(Zen·禪) 스타일과도 다르다.

‘차이나 헬스케어’는 120개 체인 거느려
가장 거센 오리엔탈풍은 역시 동양의학이다. 중국의 침술과 천연 약재를 취급하는 점포가 소도시 슬라우 중심가에만 세 군데나 있어 경쟁을 벌이고 있다. 영국과 아일랜드 전역에 120여 개 체인점이 있는 ‘차이나 헬스케어’의 직원 이(Yi·30)는 “2~3년 전부터 고객층이 두터워지고 있다”며 “현대 의학이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인도계 이민자인 앨리스 다스(62)도 “허리 통증으로 늘 고생이었는데 얼마 전부터 침을 맞으면서 좋아졌다”고 말했다.

이들 의료점이 취급하는 질환은 관절염, 습진, 다이어트, 탈모, 금연, 꽃가루 알레르기, 불면증 등 적용 폭이 넓다. 침 치료 한 번에 25파운드(약 5만원), 알레르기 테스트 35파운드(약 7만원)나 돼 그리 싸지는 않지만 2000년부터 의료보험 적용이 되면서 환자가 늘었다고 한다. 영국에선 아로마테라피나 동종요법(homeotherapy) 등의 치료사가 일반 내과 의사보다 더 많다는 통계도 있다.

대체의학 시장이 이렇게 과열되자 영국 보건 당국은 올해부터 규제에 나섰다. 보건부와 찰스 왕세자 건강재단에서 지원받는 ‘보완의학 건강관리 위원회(CNHC)’가 올 1월 19일 발족돼 활동에 들어갔다. 주간지 이코노미스트(1월 22일자)에 따르면 관련 업소가 15만 개, 시장 규모는 45억 파운드(약 9조원)에 이른다. 영국인 5명 중 한 명이 이런 치료를 받은 경험이 있다. 애완용 강아지나 고양이까지 침을 맞고 요가를 한다는 영국이고 보니 이해가 갈 만하다.

중국·인도·태국 식당의 매출이 2000년 이후 8년간 36%나 증가했다는 일간지 가디언의 보도(1월 8일자)도 런던 거리를 걷다 보면 전혀 놀랍지 않다. 만다린 칼라나 기모노 상의가 유럽 명품에까지 등장하는 디자인 컨셉트가 된 지도 꽤 됐다. 이제 그들은 삶 전체로 동방을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거나 서양식을 완전히 버리는 게 아니다. 다양한 문화유산에 각자의 영감을 실어 접목해 가는 지혜를 발휘한다.

혹자는 오리엔탈 바람이 히피즘 같은 서구의 반물질 운동의 영향이라고 한다. 그러나 요즘 오리엔탈 상품은 상대적으로 고가인 데다 이런 유행 자체가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 발전을 반영하는 측면도 있다. 동방의 유물을 싹쓸이해 가던 과거 양상과도 다르다. 막연한 동경 또는 배척이 아니라 서로의 스타일을 섞어 미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침술을 받아들이는 까닭은 동양의 심오한 정신세계 때문이 아니라 과학이기 때문”이라는 한 영국 의사의 말이 떠오른다.

런던=박정경 자유기고가 [olive-m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