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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금실 전 법무장관, 11개월 만에 만나 보니

[“요즘 뭐하세요”] 강금실 전 법무장관, 11개월 만에 만나 보니 [중앙일보]

2009.03.19 02:57 입력 / 2009.03.19 03:50 수정

“낮에는 로펌 변호사, 밤엔 생명대학원서 공부해요”
“머리 길러 보글보글 볶고 싶어
정치 도와달라해도 계획 없어”
“원래 내 성격은 은둔자형인데 사람없이 못 산다는 것 깨달아”

살아가며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만남이 많은 만큼 이별도 꼭 그만큼입니다. 글로벌 금융위기 탓이든, 가뭄 같은 천재지변 때문이든 사는 게 팍팍해질 때마다 그리워지는 건 바로 사람입니다. 오래건 잠시건 그 사람이 많은 사람의 기억 속 깊숙이 자리 잡아 있었다면, 그 사람의 말과 행동에 우리가 울고 웃고 환호하고 탄식했다면 ‘지금은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란 물음이 물안개처럼 피어오를 겁니다. “요즘 뭐하세요”는 그런 질문에 답하는 코너입니다. 첫 회는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을 초대했습니다.

‘강금실 변호사’.

책상 위에 놓인 황토색 명패가 방 주인의 신분을 먼저 말했다. “정치부 기자님하곤 별로 얘기할 게 없는데요.” 노란색 재킷을 입은 그녀가 웃으며 명패와 비슷한 얘기를 했다.

17일 오후 법무법인 원의 12층 사무실. 강금실 전 법무장관이 일하는 공간은 아담했다. 구석에 종이학이 가득 담긴 유리병이 눈에 들어왔다.

“옛날에 장관 그만둔 뒤 청주에 있는 일신여자상업고등학교 학생들이 초대해 간 일이 있었는데 선물로 줘 갖고 있어요.”

2003년 2월 그녀는 대중 앞에 깜짝 등장했다. 노무현 정부의 초대 법무장관이자 대한민국 첫 여성 법무장관으로서다. 이듬해 7월 그만둘 때까지 일거수일투족이 화제였다. 검사와의 대화 때 대통령 앞에서 다리를 꼰 것도, 국무회의에 참석한 옷차림조차도 기삿거리였다. 그 시절을 강 전 장관은 “옛날”이라고 표현했다.

지난해 4월 민주당 선대위원장 이력을 끝으로 순간이동을 한 듯 여의도 정치무대를 떠난 강 전 장관은 훨씬 밝았다. 웃음소리도 “호호” 대신 “하하”로 변해 있었다. 근황이 궁금했다.

“올 초 새로 생긴 법무법인 원의 구성원으로 합류해 변호사로 완전히 복귀했고요. 지난해 개설된 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에 들어가 지금 석사 과정을 밟고 있어요.”

쉰 살이 넘어(1957년생) 생명대학원에 다니겠다는 결정을 왜 했을까.

“제가 법무장관으로 있을 때 2004년 부활절, 일요일에 비공개로 가족들만 참석해 영세(세례명 에스더)를 받았어요. 우리 집에서 볼 땐 뚱딴지 같은 결정이었죠. 원래 저희 집안이 불교라 저도 불교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이 얘기 처음 하는데, 법무장관이었기 때문에 영세를 받은 거 같아요. 여러 사람과의 갈등이 굉장히 스트롱한(심한) 상황에서 힘들었어요. 고민하고 성찰하는 과정에서 제가 찾은 게 예수였죠. 그러다가 생명과 관련된 여러 가지 생명문화학, 생명윤리, 인간의 이해, 죽음의 이해 등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종교와 과학이 만나는 얘기를 하며 강 전 장관의 말은 길어졌다.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한 날 공교롭게도 그녀는 이탈리아 로마에 있었다고 했다.

“생명대학원 1기생으로 신부님, 대학원생들과 함께 첫 생명문화 탐방차 로마에 있었어요. 2월 16일 아침에 성베드로 대성당 문 앞에 섰을 때 추기경님이 선종하셨다는 문자메시지가 왔어요. 대성당 안의 기도실에 들어가 추모 기도를 드렸어요. 내가 지난해 생명대학원 학생이 될 수 있었던 일, 추기경님 추모 기간 동안 로마에서 추기경님을 추모할 수 있었던 것, 이 모두가 보이지 않는 인연들의 움직임같이 여겨져요.”

-내년에 졸업인가요.

“내년 2학기 때까지 논문을 써야 해요. 뭘 써야 할지 고민이에요.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며)서울시장 선거에 갖다 맞추지 마세요. 하하.”

-정치 뉴스는 좀 보시나요.

“열심히 안 봐요.”

-정치는 그만두신 건가요.

“아직 계획이 없다…. 그 이상의 답은 하기 어려워요. 당장은 로펌(법무법인) 일과 공부에 전념하고 나야 뭘 할지 윤곽이 잡히지 않을까….”

-정치권에서 또 도와달라고 하면 어쩌실 건지.

“이제는 ‘나의 정치’를 하겠다는 의지와 구체적인 계획, 실천 전략이 서지 않는 한 움직이지 않을 거예요.”

-‘내 정치’의 의미가 뭔가요.

“변호사도 마찬가지고, 정치인도 마찬가진데 정치에 대한 본인의 정체성 고민을 해야 한다고 봐요. 변호사로서 열심히 고객을 만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정치인으로서 이렇게 열심히 하겠다, 같이 해보자 하는 그런 거죠. 돌이켜 보면 장관을 그만두고 지난 정부에 개혁의 상징이었던 사람으로서 나의 의지보다는 의무감이 앞섰고, 시대에 대한 책임감이 작용했던 게 사실이에요.”

이 말을 끝으로 강 전 장관은 정치와 관련해선 “더 할 얘기도, 아는 것도 없다”고 했다.

이날 강 전 장관의 옷차림에선 보라색이 사라졌다. “내가 보라만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그때그때 달라요. 요즘은 노란색이 좋더라고요. ”

항상 짧은 커트형의 헤어스타일을 고집하는 이유가 뭔지 물었더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기르는 중이에요. (어깨를 가리키며)요만큼 길어서 보글보글, 곱실곱실하게 해보려고…. 더 늙기 전에 한번 길러 보려고요. 하하.”

강 전 장관은 2003년 재산신고 때 빚 때문에 주목을 받았다.

“(법무법인 원에서)다달이 받는 급여에서 적금과 보험을 여러 개 들어 노후에 대비하기 시작했어요. 요즘 열심히 절약하고 살아요. 빚도 많이 갚았어요.”

새로 시작한 취미가 없는지 묻자 엄살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매일 사무실에 출근하고, 1주일에 두 번 대학원 강의 들으러 가요. 숙제가 만만찮아요. 대학 졸업하고 30년 만에 영어책을 읽고 파워포인트로 프레젠테이션도 해야 했어요. 전통 춤은 선생님과 시간이 맞을 때만 연습해요. 다른 취미 생활을 하기엔 너무 바빠요.”

인터뷰 말미에 강 전 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원래 내 성격은 은둔자형이에요. 그렇지만 살면서 점점 깨닫는 건 제가 사람을 무지 좋아하는… 사람 없이는 못 사는 거 같아요. 제가 독립적인 사람인줄 알았거든요. 요즘 와서 발견했는데 굉장히 의존적인 사람이더라고요.”

글=박승희 기자, 사진=김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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