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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 연구 후학 길러라’ 평생 모은 70억원 쾌척

 

순수 학술단체에 기부 이헌조 LG전자 고문

경향신문 | 김주현 기자 | 입력 2010.11.09 21:46

 

여든을 앞둔 노기업인이 평생 받은 월급을 모아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순수 학술단체에 희사했다. 자식들에게 남겨줄 유산을 사회에 환원한 셈인데 정작 본인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꺼리고 있어 잔잔한 여운을 주고 있다.

9일 다산연구소와 국학계 원로 등에 따르면 이헌조 LG전자 고문(78·전 LG전자 회장)이 최근 70억원을 재단법인 실시학사(實是學舍)에 기부했다.

실시학사는 국학계 원로인 이우성 선생(85)이 1990년 성균관대를 퇴임하면서 젊은이들에게 한학을 가르치기 위해 마련한 일종의 서당이다. 이 고문이 평생 모은 사재를 이곳에 기부하면서 실시학사는 지난 10월 한국 실학을 연구하는 재단으로 변신했다.

대기업이나 독지가가 학술단체에 사재를 기부해 재단을 세우면 이사장 같은 '자리'를 요구하는 것과 달리 이 고문은 1년짜리 '평이사'에만 이름을 올렸다. '한국 실학 연구'에 출연금을 써달라는 것 외에 기금 운용 등 다른 조건은 일절 요구하지 않았다.

이 고문과 이 선생의 인연은 1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선생이 운영하는 한시모임 '난사(蘭社)'에 이 고문이 참여한 것이다. 이 모임에는 조순 전 총리, 김종길 전 고려대 교수, 김용직 전 서울대 교수 등도 참여하고 있다.

오랫동안 인연을 맺어온 이 선생이 올해 학사 문을 닫겠다고 하자 이 고문이 나섰다. "후학을 모아 학문을 가르쳐야지 실시학사를 접으면 안된다"며 거액을 쾌척한 것이다.

LG그룹에 따르면 이 고문은 LG 재직 시절에도 각종 학술단체에 회사 명의나 개인 이름으로 많은 기부를 해왔다고 한다. 한국실학학회, 한문학회 등 기업 경영과 크게 상관없는 순수 학술 분야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고문은 기업인으로서도 재계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국내에 가전 산업을 뿌리내린 주인공으로도 불린다.

57년 락희화학공업사에 입사해 84년 럭키금성상사 사장을 거쳐 금성사(현 LG전자) 사장·부회장·회장을 역임한 전문경영인 1세대다. 구자경 명예회장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LG그룹의 밑그림을 그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80년대 말까지만 해도 다국적 기업의 주문자상표부착(OEM)방식 업체에 불과하던 LG전자를 세계적인 기업 반열에 올려놓은 주인공이다.

LG가 강조하는 '정도경영'을 충실히 실행해온 이 고문은 93년 LG전자 창원공장 파업을 마무리지었다. 이후 창원공장은 십수년 동안 분규가 없는 사업장으로 변신했다.

이 고문은 거액을 순수 학문연구에 기부한 사실이 알려지자 "세상에는 이보다 훨씬 훌륭한 일을 하는 분들이 많다"며 "뭐 대단한 일도 아닌데 입에 오르내리는 게 부끄럽다"고 인터뷰를 정중히 거절했다.

< 김주현 기자 amicus@kyunghya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