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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와 사람]국내 첫 프로파일러 권일용 경위



2008 04/08   뉴스메이커 769호

“무동기 범죄자 심리 방어벽 허문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대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 역시 그대를 들여다본다.”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이다. 이미 철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경구 중 하나지만, 프로파일러(범죄행동분석관)의 활약을 다룬 미국 범죄수사물 ‘크리미널 마인드’에 소개되면서 국내 미드 마니아들 사이에서도 널리 알려졌다. 악의 실체를 파헤치기 위해 악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자기 내면에서 선악의 경계가 무너지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경찰청 범죄정보지원계 권일용(43) 경위는 이 위험한 모험을 일상적으로 감행한다. 그것이 그의 직업이기 때문이다. 국내 최초의 프로파일러이자 안양 초등생 살해 사건 수사 과정에서 범인 정모씨의 자백을 받아내는 데 기여한 것으로 알려진 그를 지난 25일 오후 경찰청에서 만났다.

“존 더글러스(프로파일러의 시조로 알려진 미 연방수사국 수사관)의 책에서 처음 니체의 경구를 읽었을 때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뒤 300명 이상의 범죄자를 상대하면서 이 말의 뜻을 절감했다. 인간은 본래부터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본능을 갖고 있는 게 아닌가, 범죄자와 평범한 사람의 차이란 그 어두운 본능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느냐 마느냐의 차이에 불과한 게 아닌가라는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범죄 흔적으로 범인 성격 추론”
프로파일러는 범인의 뒤를 쫓지 않는다. 그는 범인의 지문이나 DNA를 추적하는 대신,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현장에서 발견된 혈흔의 패턴을 분석하거나 살인에 사용된 도구를 가리는 것은 감식요원의 일이다. 프로파일러는 범인이 ‘왜’ 그러한 방식으로 공격했는지, ‘왜’ 다른 방식으로는 하지 않았는지 따진다. 프로파일러는 범행 현장에 남아 있는 희미한 흔적으로 범인의 행동 방식을 파악하고, 그것으로부터 범인의 성격을 추론한다. ‘모든 행동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고, 그것은 반드시 범인의 성격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프로파일링의 전제다. 프로파일러를 행동분석관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프로파일러에게 다른 사물들과의 연관 고리 없이 존재하는 사물은 없고, 사람의 손길이 스친 사물 치고 그 사람의 성격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 없다. 프로파일링을 통해 경찰 수사는 증거를 수집하는 수준에서 그 증거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수준으로 도약한다. “행동분석관들이 왜 과학수사계 안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 감식요원들은 현장에 무엇이 떨어져 있는지 살피고, 행동분석관들은 그것이 왜 존재하는지, 왜 이런 사건이 벌어졌는지 추론한다.”

과학 수사에 프로파일링을 도입한 것은 범죄의 패턴이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목적을 알 수 없는 범죄가 증가하고 지능화된 범인들이 현장에 증거물을 남기지 않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이전보다 고도화된 수사 기법을 사용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무동기 범죄에 대처하기 위해 과학 수사의 영역이 분석과 해석의 단계로 확장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반적인 범죄, 가령 강도나 절도의 경우에는 프로파일링이 유용하지 않다. 그런 범죄는 범행 동기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프로파일링이 발전한 배경은 상식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이유로 저지르는 무동기 범죄 때문이다.”

프로파일링은 특정 범죄의 유형을 분석해 범인 검거의 효율성을 높여주는 기술이기도 하지만, 고도의 심리적 전략을 구사하여 범인으로부터 자백을 받아내는 기술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강압적이거나 감정에 호소하는 방식을 썼다면, 지금은 범인의 심리적 방어벽을 허무는 방식을 사용한다.” 안양 초등생 살해 사건 피의자 정모씨가 진술을 번복하면서 수사가 난관에 부딪혔을 때 행동분석관들이 투입된 것도 그런 이유다. 이를 위해 권 경위가 이끄는 행동분석관들은 범인과 심리적 공감대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정씨가 갖고 있는 성적 환상은 굉장히 왜곡되어 있다. 집에서 발견된 포르노물을 보면 굉장히 충격적이다. 성적인 부분에 대해 물었더니 포르노물과 자기를 연결짓지 말라면서 답변을 거부했다. 그래서 ‘그러면 그 부분은 빼고 가자’라고 했다. 정씨는 ‘당신도 포르노 동영상을 보면 더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걸 찾게 되지 않느냐’라고 내게 물었다. 그때 ‘맞다, 나도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이런 식으로 교감을 하면서 정씨는 나를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자신을 지지해줄 수 있는 사람으로 판단하게 됐다. 정씨가 자백을 하지 않았던 데는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던 사람이라는 사정이 있다. 그는 정상적인 커뮤니케이션에 굉장히 미숙한 사람이다.”

권 경위에 따르면 피의자 정씨는 일반적인 도덕 관념을 벗어나는 사고 방식을 지녔다. “그는 이런 식이었다. ‘왜 죽였는지 자꾸 묻지 마라. 이미 죽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나. 지금 내게 중요한 건 앞으로 재판에서 몇 년 형을 받느냐 하는 문제다. 하필 애들이 그곳을 지나가서 죽이게 됐는데, 아이들도 원망스럽고 나도 원망스럽다. 왜 죽였는지 궁금해하는 건 당신들 문제지 나는 관심이 없다.’ 그러니까 허위진술을 하는 게 아니라 죄의식이 없는 것이다. 죄의식이 없으니 자백할 이유도 납득하지 못하는 것이고. 이러니 설득이나 감정에 대한 호소로는 대화할 수 없다.”

“프로파일링이 만능 열쇠는 아니다”
권 경위는 프로파일링이 사이코패스 범죄 수사의 만능 열쇠처럼 여겨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프로파일러가 주목받는 것은 우리가 대하는 사건이 워낙 사회적으로 충격적인 것이어서 그런 것 같다. 프로파일링만으로 범죄를 해결할 수는 없다.

일선 수사관의 수사, 현장감식, 과학 수사가 유기적으로 결합해야 한다. 프로파일링은 범죄 수사의 효율성을 높여주는 수단일 뿐이다. 프로파일링만으로 범죄를 해결했다고 말하는 건 불가능하다.”

권 경위는 8년 동안 현장감식요원으로 일하면서 범죄 유형과 범죄자의 성향 사이에 일정한 연관이 있음을 깨닫고 프로파일링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는 “범죄자의 내면으로 들어가 그의 눈으로 범행 현장을 보고 세상을 보아야 하는 스트레스”가 프로파일러의 가장 큰 직업적 고충이라고 털어놓았다. 자기 중심을 든든하게 잡지 못하면 범죄자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동안 정신적으로 소진될 위험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현재 국내에는 30여 명의 프로파일러가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고, 10명의 예비 프로파일러가 교육을 받고 있다. 사회학과 심리학 학위를 갖고 경장으로 특채된 이들은 경찰학교에서 실무와 이론 교육을 받고 현장에 투입된다.

<글·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